[기울어진 극장] 산적의 딸들을 위하여
[기울어진 극장] 산적의 딸들을 위하여
  • 김지은 아동문학평론가
  • 승인 2018.03.21 10:41
  • 수정 2018-03-25 13: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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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 내 성폭력에 눈 뜨고

말하고 귀기울이는 게 동화의 정신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을 맡은 교사는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는 순간을 지켜본다. 초임 교사가 6학년을 맡게 되면 학생과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아서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이 몇 년 뒤 동료의 느낌으로 찾아올 때도 있다. 

A선생의 경우도 그랬다. 어느 날 찾아온 훌쩍 자란 제자는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교수가 일으킨 대학 내 성폭력 사건을 털어놓았다. 자신과 함께 동시와 동화를 읽으면서 작가를 꿈꾸게 된 학생이었다. 제자가 다니는 대학 강의실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A선생은 자신이 재학 중 다른 곳에서 겪은 비슷한 성폭력 경험을 떠올렸다. 자신이 먼저 이 폭력의 고리를 끊어놓지 못했던 것이 제자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선생님에게 틴트를 빌려주면서 화장법을 조언하는 지금 교실의 사랑스러운 학생들도 몇 년 뒤면 곁을 떠난다. 어린 제자들 중 일부가 진학하게 되는 중학교에서는 최근 학생들의 미투 선언이 이어지는 중이다. A선생은 성폭력이 만연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과거 피해 경험과 제자가 겪을 미래를 떼어놓을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다.

지난해 문단 내 성폭력 문제가 연일 터져 나오는 중에도 아동청소년문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곳은 안전지대’라고 여기는 안일한 태도가 있었다. ‘성’은 ‘성인들의 문제’이며 ‘우리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관계자’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화의 독자야말로 가정과 학교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에 가장 취약한 피해자 그룹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미투 운동과 함께 다시금 입증되고 있다. 자신이 겪은 폭력적 행위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어린이는 성인이 돼서 비로소 고발을 결심한다. 동화나 동시를 쓰는 작가는 좀 다를 것이라는 세간의 짐작은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틀렸다.

작년 6월 20일 발표된 ‘어린이문학출판계 성폭력 성명서’에는 작가 266명과 출판인 181명을 비롯한 1802명이 서명했다. 이 성명서가 제안된 배경인 아동청소년문학 내 성폭력 사건에 대한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월간 「어린이와 문학」은 지난 6개월간 ‘어린이·청소년문학에서 바라본 여성주의’ 특집을 진행하며, 작가가 자신의 성차별적 관념과 인권 감수성을 짚어보지 않고 창작한 작품을 비판할 필요가 있다고 문제 제기했다. 이런 움직임을 계기로 그간 작가가 편집자를, 작가 지망생을 대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백과 반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2017년 6월 발표된 어린이문학출판계 내 성폭력 반대 성명서 ⓒ여성+어린이+문학
2017년 6월 발표된 어린이문학출판계 내 성폭력 반대 성명서 ⓒ여성+어린이+문학

동화에 ‘멋진 세상, 좋은 이야기들’만 쓰이지는 않는 것처럼 아동청소년문학 종사자라고 해서 성폭력의 현실로부터 예외일 수 없다. 어린이들은, A선생의 제자가 그랬던 것처럼 이 어른들이 쓴 동화를 읽고 작가의 꿈을 꾼다. 더불어 성폭력 피해를 자각하고 고발의 용기를 내는 연령도 낮아지고 있다. 어린이와 동화를 읽는 A선생의 고민은 동화작가의 고민이면서 책을 만드는 출판인, 책을 권하는 양육자 모두의 고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아직 창작자 집단 내부의 성인지와 성폭력에 대한 이해는 낮은 상황이어서 어린이들의 달라지는 현실 인식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어린이책 작가들이 모인 카페 게시판에서 공개적으로 벌어졌던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사건은 지켜보는 사람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우리는 다를 것’이라는 묵인 속에서 자라난, 폭력의 어두운 실체를 확인한 사건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며 심각성을 공유한 ‘어린이청소년책작가연대’는 오는 30일에 ‘젠더 감수성과 미투운동’이라는 주제의 교육을 마련하고 성폭력위원회를 설립한다.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작품 ‘산적의 딸 로냐’에서 누구도 착취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여성 로냐를 그렸다. 주인공 로냐와 비르크는 부모와 같은 산적의 길로 들어서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우리는 그 가능성을 돕지 못할망정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지금은 무척 뼈아픈 시기다. 우리는 더욱 눈을 뜨고 입을 열고 귀를 기울이겠다. 그것이 본래 동화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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