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성별, 연령,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나 필요할 때

좋은 돌봄 받을 수 있어야

 

 

인간은 독립적이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며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교과서에서 배웠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교과서 밖의 삶에서 이 말이 허구임을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내가 홀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십수 년 이상 누군가가 나의 의식주를 돌봐줘야 한다. 정서적인 지지를 퍼부어줘야 한다. 나의 몸과 마음의 안녕을 살펴줘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아프거나 신체적‧정신적으로 무력할 때 나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미래지만, 노년의 나는 역시 먹고 움직이고 생활하기 위해 누군가의 손길을 원할 것이다.

이런 일들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그 날부터 오늘까지 대개 여성들이 수행해 왔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엄마’ 또는 ‘아내’, ‘할머니’, ‘아주머니’, ‘언니’, ‘누나’로 불렸다. 세대를 가리지 않고 돌봄은 여성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그것은 일이고 노동이지만 대개 ‘사랑’이거나 ‘천직(天職)’이거나 규범적 역할로 여겨져 왔다. 때문에 돌봄에 대가를 지불하거나 돌봄을 돈으로 주고 사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엄마가, 할머니가, 누이가 조건 없이 베풀어주는 사랑이고 헌신이라고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우리 주변의 여성들이 이 그림자 노동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 여성들도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 스스로를 부양해야 했기 때문이다. 교육을 받고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삶을 꾸리기 위해 남성과 함께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인간 사회의 평등과 민주주의의 성장에 기여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우리는 여성 또는 남성이기 이전에 인간이자 시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한국사회는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는 누가 키워야 하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은 누가 돌봐야 하나? 아픈 이와 장애를 가진 사람은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나? 이런저런 궁색한 답변을 찾을 수는 있지만, 아직까지 한국사회는 이런 질문에 대한 믿음직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2018년 지금도 우리는 보육교사의 힘든 노동과 저임금을 걱정하고 요양보호사와 아동‧장애인 돌보미의 임금이 최저임금조차 맞추기 어렵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할 뿐이다.

이런 속수무책의 현실 앞에서 나는 미래가 불안하다. 나는 생애의 어느 시점을 요양병원에서 보내게 될 텐데, 그때 나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언론보도에서 종종 접하게 되는 어둡고 냄새나는 음울한 요양병원을 나만은 피할 수 있으리라는 얄팍한 희망에 안주할 수 있을까? 나의 딸과 아들의 아이들은 여전히 보육교사 한 명이 십 여 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어린이집에서 어수선한 하루를 보내야 할까?

나는 나와 내 아이들의 미래가 돌봄노동자들의 한숨과 눈물에 맡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생명을 키우고 성장시키는 노동의 사회적 가치가 인정받고 돌봄이 제값을 받는 사회에서 아이들이 자라기를 원한다. 노인을 돌보는 노동자들이 높은 자부심을 갖는 공간에서 노년을 보내고 싶다. 인간을 돌보는 노동이 물건을 생산하는 노동과 동등하게 대우받는 사회에서 살기를 원한다.

새 헌법이 진정으로 새로운 헌법이 되려면 돌봄권을 포함해야 한다. 인간은 성별이나 연령,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나 필요할 때 좋은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가 그것을 기본적인 과제로 삼아야 한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돌봄권을 신설한 새 헌법안을 제시하고 있다. 나와 내 아이들의 미래가 ‘돌봄민주주의 헌법’이 보장하는 돌봄사회에서 펼쳐지기를 희망한다.

인간은 상호의존적인 존재다. 서로 돕고 의지하지 않으면 생존조차 불가능한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인간의 본질적인 취약성에 눈 뜨고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위험에 대비하려는 노력을 이제 시작해야 한다. 돌봄권의 신설은 그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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