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고 느릿한 딸은 언제나

안달복달 허둥지둥하는

나를 안심시켰다

플랜B도 얼마든지 의미

있고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딸!

 

쇼딧치의 명물 서점 북아트북샵. 새빨간 벽과 특이한 벽화가 눈길을 끄는 예술 서적 전문 서점이다. ⓒ박선이 교수
쇼딧치의 명물 서점 북아트북샵. 새빨간 벽과 특이한 벽화가 눈길을 끄는 예술 서적 전문 서점이다. ⓒ박선이 교수

40일이 넘은 여행을 마무리할 시간이 왔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휴대폰을 도둑맞았고 너무나 친절한 사람들을 만났다. 미친 듯 미스트랄(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부는 강하고 건조한 국지풍)이 불어오는 방투산을 자전거로 여행하는 오스트리아인 가족 중 두 초등학생 딸은 베트남과 중국 출신 입양아였다. 라벤더밭을 배경으로 우리 모녀 사진을 찍어준 큰딸의 자부심 가득한 웃음이 지금도 생생하다. 자동차 기름이 간당간당할 때 주유소 위치를 알려준 프로방스 산골 마을 할머니가 “나도 늘 아슬아슬할 때 기름을 넣는다”며 걱정 말라던 미소도 아름다웠다. 가장 고마운 사람은 역시 동행인 딸이다. 느긋하고 느릿한 딸은 언제나 안달복달 허둥지둥하는 나를 안심시켰다. 플랜 B도 얼마든지 의미 있고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딸!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여행 예찬론자였다. 19세기 세계 최강대국 영국을 낳은 교양은 귀족뿐 아니라 부르주아 가정에서 대대적으로 유행했던 ‘그랜드 투어’, 요즘 말로 하면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인문학 여행에서 나왔다. 베이컨은 여행에서 관찰과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왕후의 궁정, 법정, 교회와 수도원, 도시의 성벽과 성채, 항만, 고적과 폐허, 도서관, 대학, 호화 저택, 상류 사회 사람들이 관람하는 공연, 보석과 귀중품, 골동품을 꼭 보라”고 권했다. 한 도시에 오래 머물려면 서로 다른 장소에 묵어보고, 자기 나라 사람과 어울리는 대신 그 도시의 좋은 사람들이 찾는 곳에서 식사하라는 권유도 보탰다. 400년 전 베이컨의 권유는 나와 딸의 이번 여행에도 그대로 들어맞았다. 우리는 옛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유산을 통해 오늘의 삶을 고양하고 미래를 꿈꾼다.

긴 여행의 마무리는 런던에서, 그것도 조용하고 고적한 런던을 발견하고 즐기는 것으로 이뤄졌다. 런던은 약 820만 명이 사는 대도시다. 서리(Surrey), 미들섹스(Middlesex), 에식스(Essex), 켄트(Kent) 등 런던 주변 지역(분당, 일산, 평촌, 산본과 같은 신도시와 수원, 용인, 구리, 남양주, 의정부 등 인근 도시를 생각하면 된다)까지 그레이터 런던 너머에서 런던 생활권에 속하는 인구는 1000만명이 넘는다. 비즈니스와 여행 등으로 런던을 방문하는 외부인이 연간 연 5000만명에 이르며, 런던 쇼핑가인 옥스퍼드 스트리트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피카딜리 같은 거리는 문자 그대로 어깨를 부딪치며 걸어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테이트모던의 로스코 컬렉션. 밀도 높은 색채의 작품들이 내면의 대화를 이끌어낸다. ⓒ박선이 교수
테이트모던의 로스코 컬렉션. 밀도 높은 색채의 작품들이 내면의 대화를 이끌어낸다. ⓒ박선이 교수

고요한 런던? 형용모순 아닐까. 그러나 사람에 지치고 소음에 지친 런던 사람들, 방문객들을 위한 조용한 장소는 얼마든 있다. ‘여기가 런던 한복판?’ 하고 놀랄만한 곳들이 있다. 조용하고 다정한 서점과 도서관, 자그만 공원 그리고 웬만한 공원보다 아름다운 묘지들이다. 그동안 이 지면을 통해 우리 모녀가 함께 여행한 독자들에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런던의 서점과 도서관을 살짝 알려드린다. 다리 펴고 쉬면서, 마음 속 앙금으로 가라앉았던 이야기들이 훌훌 풀어져 나왔다. “엄마는 나한테 뭐 먹을지, 어디 가면 좋을지, 뭐 하러 물어봐, 결국 맘대로 할 거면서!” “그거야 네가 빨리 답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생각을 해야 답을 하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해!” 좋고 싫은 게 분명하고 판단이 빠른 엄마, 이런저런 사정을 따져 오래 생각해야 하는 딸, 한여름 내내 그렇게 투닥거렸다. 사과 주스를 마실지 맹물을 마실지, 빅토리아 앤 알버트 안뜰에서, 꽤 오래 생각하고 정했다. 둘 다 사서 반반 마시기로.

 

해처즈 서점의 쇼윈도. 스파이 스릴러 작가 존 르카레 특집으로 꾸몄다. ⓒ박선이 교수
해처즈 서점의 쇼윈도. 스파이 스릴러 작가 존 르카레 특집으로 꾸몄다. ⓒ박선이 교수

*해처즈(Hatchards)

관광과 쇼핑 중심인 피카딜리 한가운데 있는 이 서점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우아한 고요와 정적을 유지한다. 유명한 식품점 겸 찻집인 포트넘 앤 메이슨 바로 옆에 있다. 다른 서점에서 찾기 어려운 전기류, 역사 서적이 많다. 우리는 펭귄북스 디자인으로 만든 가방과 파우치를 샀다.

*북아트북샵(Bookartbookshop)

쇼디치 입구에 있는 서점으로 규모는 작지만 손으로 묶은 책이나 한정판 등 희귀한 서적이 많은 곳이다. 서점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꽤 잘 나온다.

 

브리티시 라이버리 북샵. 특이한 책들과 기념품을 살 수 있다. ⓒ박선이 교수
브리티시 라이버리 북샵. 특이한 책들과 기념품을 살 수 있다. ⓒ박선이 교수

 

브리티시 라이브러리 로비. 사람들이책을 형상화한 벤치에 앉아 쉬고 있다. ⓒ박선이 교수
브리티시 라이브러리 로비. 사람들이책을 형상화한 벤치에 앉아 쉬고 있다. ⓒ박선이 교수

*대영도서관(British Library)

20년 전 유스턴 역 현재의 자리로 옮기기 전까지 이 도서관은 대영박물관 구내에 있었다. 1753년 대영박물관 부설로 설립된 이 도서관에서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썼다. 영국의 영웅서사시 베오울프(Beowulf) 초판본, 마그나카르타 진귀한 히브리 문서 등을 포함, 2500만 권 이상의 도서와 정기간행물, 12만 권 이상의 필사본, 10만 개 이상의 문장(紋章), 3000개 이상의 파피루스를 소장하고 있으며, 일반인이 빌려볼 수 있는 책도 450만 권이 넘는다. 현재의 새 건물은 예전과 비할 수 없이 넓은 데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데스크(노트북 전원도 있다), 카페테리아, 휴게실 등 방문객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넓고 조용하다. 쇼핑과 관광에 지친 여행자가 두어 시간 쉬어가거나 온종일 놀 수 있는 곳이다. 도서관 입구 북샵에서는 주요도서 초판본의 복제품과 재미있는 출판물 등을 팔고 있다. 제인오스틴 테마로 만든 수첩과 가죽 장정의 명함판 메모장을 샀다.

 

*내셔널 아트 라이브러리(National Art Library)

디자인과 공예, 장식품 박물관으로 세계 최고인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V&A) 안에 있는 이 도서관은 관객으로 북적이는 박물관 다른 구역과는 너무도 달리 고적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가죽 장정 도서 등 온종일 살펴보아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다양한 책을 지니고 있다. 이용은 무료이지만, 사전에 혹은 현장에서 회원가입을 해야 한다. 온라인 가입신청은 https://nal-vam.on.worldcat.org/discovery. 책을 읽다 시장하면 카페에서 제대로 된 식사부터 가벼운 스낵까지 선택할 수 있으며 늦은 봄부터 가을까지는 야외 카페가 최고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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