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한 세 살 쯤 되었을 때 일이다. 우리집엔 그 흔한 한글브로마이드 한 장 없었다. 딸애가 다니는 공동육아 어린이집 역시 아이들에게 한글, 숫자, 영어교육을 따로 해주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고 우리 부모님 하시는 말씀,

“지들은 배울 만큼 배웠다구 딸자식을 무식쟁이로 만들어!”

나는 ‘언젠가 자신이 글자를 알고 싶을 때, 스스로 신호를 보낼 것이다’는 생각으로 그냥 딸애의 성장을 지켜보고, 기다렸다.

만일 내 주변에 애들 학습지, 피아노, 발레, 외국어를 경쟁적으로 가르치는 부모들이 가득했다면, 그야말로 ‘내버려두는’ 여유를 고수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글조차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확신’하게 된 또다른 계기가 있다.

어린이집 교사 중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아이들은요,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고, 느껴요. 우리가 꽃이라고 부르고, 꽃이라고 쓰는 것을 아이들은 모양, 향기, 느낌으로 기억하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아이들은 개념에 갇히지 않은 어떤 이미지로, 자기 만의 것으로 흡수하고 있어요. 너무 일찍 글이나 개념을 알게 되면, 아이가 경험하는 세상도 그 개념 안에 갇히게 되죠. ”

@26.jpg

여섯 살이 된 딸아이는 요즘 한글을 하나 하나 깨우쳐가고 있다. 스스로의 욕구에 따라, 자신의 속도에 맞추어서 말이다. 가만히 보니까, 한두 살 위의 언니 오빠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글쓰고 읽게 된 것이 부러운 모양이기도 하고, 또 세상에 그 많은 ‘문자부호’들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도 생겨난 것 같고, 자신이 말하게 된 어떤 단어들을 글로도 써보고 싶다는 욕구와, 엄마나 아빠에게 의지하지 않고 동화책을 혼자 읽고 싶어서 글을 배우려 하는 것 같다.

기특하게도 우리 딸애 뿐 아니라 어린이집 또래 꼬마들이 때가 되니까 마치 그림 그리듯 글자를 터득해 나가기 시작한다. 요즘엔 딸아이와 함께 글자놀이를 한다. 받아쓰기도 하고, 함께 나들이 할 때 거리에 붙은 간판읽기도 하면서 말이다.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세상과 만나 의사소통 하고 싶은 만큼 ‘글의 세계’에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우리는 누군가와 의사소통하기 위해 말을 하고 글을 쓴다. 나를 드러내고,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 지식을 얻기 위해서….

언젠가 ‘영어로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질 때’ 영어로 누군가와 의사소통 하고 싶어질 때 아이는 또 제 스스로의 욕구로 새로운 언어와 만나려 할 것이다.

영어조기교육, 영어과외, 어린이 영어연수…. 요즘은 영어를 아이들 머리 속에 우겨 넣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회 전체가 열병을 앓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은 나이 서른이 넘도록 외국인과 일상적인 대화 한마디 못하는, 제도권 영어교육을 10년 이상 받았으면서도 영어를 못하는 우리 세대의 ‘영어에 맺힌 한’을 아이들에게서 풀어보려는 어른의 욕구인 건 아닐까?

아이가 우리말과 글을 만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기다려주는 것’만이 가장 좋은 배려임을 알았다.

영어와 만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의 경험이 풍부해지면 질수록, 아이의 언어도 풍성해질 것이다. 모든 언어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우리의 경험이 언어를 변화시킨다.

어릴 때 많이 놀고, 경험한 아이는 언어 안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만난 세상을 말과 글로(영어든 우리말이든) 표현하고 싶어할 때까지, 세상과 만날 수 있는 다양한 통로와 기회를 아이에게 열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이숙경/아줌마페미니스트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