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언덕
밤언덕
  • 여성신문
  • 승인 2005.05.12 16:29
  • 수정 2005-05-12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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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폐지를 위한 특집콩트 (상)
희숙은 우선 냄새나는 스타킹부터 벗어들고 화장실로 갔다.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라면을 끓여먹었다고 했다. 막내는 희숙이 집에 오기 전부터 벌써 자고 있었다.



“영주야, 동수 이빨은 닦아준거야?”

큰애 영주가 도리질을 쳤다.



“내가 뭐랬어. 동수 유치원에서 오자마자 밥 먹이고 이빨부터 닦아주라니까.”



“라면 다 끓여서 먹으려고 봤더니 동수가 이미 자고 있었단 말야.”



“아니 그럼 동수는 라면조차도 안먹었단 말야?”



“응. 아무 것도 안먹었으니까 이빨 안닦아줘도 되잖아.”



“아이구, 내가 못산다. 우리 동수 얼마나 배가 고플까, 그래.”



보험이라는 적성에도 안맞는 일로 돈 번다고 밖으로 나돌아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보다도 우선 어린것이 끼니도 못챙겨먹고 고픈 배를 안은 그대로 잠이 들어 있는 상황이 희숙은 견디기 힘들다. 그렇다고 큰아이를 마냥 혼내고 있을 수만도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영주도 이제 겨우 초등학교 4학년 짜리, 아이일 뿐인 것이다. 얼굴에 땟국물이 범벅인 채로 아침에 희숙이 입혀서 유치원에 보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자고 있는 막내아이 동수의 옷을 벗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혀서 방으로 옮겨놓고 나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네, 인구조사 나온 아르바이트입니다.”



아르바이트라 해서 혹시 수세미 같은 걸 팔러온 대학생인가, 했는데 희숙 또래의 아줌마다.



“현재 함께 거주하는 사람들 이름과 나이를 말해 주세요.”



수없이 많은 집을 다니면서 같은 말을 반복했음인지 여자는 들어서자마자 자동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정희숙.”



먼저 제 이름부터 대놓고 본다.



“본인이신가요?”



“네.”



“세대주는 누구지요?”



“정희숙, 본인이 세대준데요.”



“아 그렇습니까? 그럼 자녀분들 성함을….”



“유영주.”



“나이가?”



“열한살.”



“그 다음엔요?”



“유영미. 여덟 살.”



“또 없습니까?”



“아, 동수.”



“유동수요? 몇 살이죠?”



“아니예요, 아줌마, 우리 동수는 유동수가 아니고 김동순데.”



둘째 아이 영미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툭 거들고 나선다. 인구조사원 아줌마가 맞느냐고 확인하려는 차원인지 희숙을 빤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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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아이들 공부도 봐줄 수 있을 것이고 교육자이니 가정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더 이상 생계에 대한 공포로 떨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그것을 계산이라고 말한다면 굳이 부인하고 싶지 않을 생각들이 머릿속에 펼쳐지던 거였다







“아, 저 그게, 네에.”

무슨 죄를 진 것도 없건만 순간, 얼굴에 갑자기 열이 오르면서 희숙은 목이 저절로 움츠러든다.



“모두 자녀분들 맞지요?”

유동수의 유자를 김자로 정정하며 여자가 묻는다.



“아, 네에.”

인구조사원 아줌마가 돌아가고 난 뒤 희숙은 굳이 그럴 것도 없건만, 영미한테 큰소리를 팍 내지른다.



“야, 유영미. 너 똑똑한 것 천하가 다 아니까, 제발 나설 때 안나설 때 구별 좀 하고 나서라 이년아.”



생각같아선 한 대 콕 쥐어박아 주고도 싶지만, 아이는 이미 엄마한테서 큰소리가 나는 순간 어디론가 쏙 몸을 숨겨버렸다. 영미가 몸 숨길 곳이 옷장안 뿐이라는 건 또 이집 식구들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영미는 정말 철이 없다니까. 지난번 놀이공원에 갔을 때도 그랬잖아.”



철이 없기는 저도 오십보백보이면서 엄마가 영미를 나무라는 순간을 기회 삼아 영주는 또 영미의 지난 실수까지 들추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평소에 영미한테 당하고 산 것에 대한 보복을 삼는 것이다. 지난 봄 어느 일요일, 평소에 아이들이 그렇게 소원을 하던 놀이공원엘 큰맘먹고 간 적이 있었다. 일요일이면 할 일이 태산같았다. 일주일 내내 밀렸던 빨래며 청소를 해야 하고 김치며 반찬도 만들어야 하고 날마다 봐주지 못하는 아이들 공부도 좀 봐줘야 하지만 그날은 왠지 모르게 희숙이 본인 마음이 울적해서 바람이라도 쏘이고 싶은 마음에 간 놀이공원이었다. 입장권을 사는 곳에서 초등학생부터 요금이 적용된다고 해서 초등학교 1학년인 영미를 일곱 살 유치원생이라고 희숙이 거짓말을 했는데 옆에서 엄마의 수작을 지켜보던 영미가 대뜸,



“나, 유치원에 안다니고 학교 다니는데, 나 일곱 살 아닌데….”



그랬던 것이다. 입장권 파는 아가씨가 희숙을 사납게 뜯어보다가 영미를 향해 배시시 미소를 흘리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다 저려오는 것 같다.



먹다 중단한 밥을 대충 입안에 몰아넣고 나서 희숙은 설거지도 미뤄논 채 텔레비전 앞으로 가서 누워버렸다. 제가 좋아하는 코미디 프로가 나와서인지 영미도 더는 옷장 안에서 배기지 못하고 희숙 옆으로 쭈뼛쭈뼛 다가와 또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청해서 손발을 주물러주는 시늉을 한다. 정말 미워서 미워한 적이 한번도 없는 제 새끼들이었다. 하지만,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제 혼자 힘으로 건사하기가 너무도 힘들어 희숙은 본의 아니게 아이들한테 일쑤 짜증을 냈던 것이 사실이었다. 옆집 아름이 엄마는 애들한테 짜증을 내는 희숙에게 넌지시 다가와 이런 말을 했다.



“그거이 다 살침을 못맞아서 애먼 애들한테 그 화살이 날아가는 거라. 그러게, 내가 소개해주는 그 남자 한번 만나보그라. 저 아래 보이는 아파트에 사는 남잔데 사람이 얼매나 자상하고 따순지 내사 마, 이 결혼 작파하고 그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다 드는기라.”



일견 희숙을 무척이나 생각해주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희숙은 이내 도리질을 쳤다.



“나는 내속으로 난 자식 내 손으로 다 거두고 싶으니까, 내 앞에서 도통 결혼 말 같은 거는 하지를 말아주세요.”



“누가 뭐래? 니 속으로 난 자식 니 손으로 다 키우는 거는 누가 못하게 할 사람 아무도 없다. 그 아이들 다 데리고 들어가 살면 되지 않겠나? 사람이 얼매나 성실하고 좋은 사람인지, 그 사람 다니는 학교 아이들이 그냥 선생님이라고도 안하고 아부지라고 한다더라. 직업도 깨깟허니 학교선생님, 얼매나 좋노. 더군다나, 그 집에는 애들도 다 컸다고 하더라.”



그 남자를 만났던 건 아름이 엄마 성화 때문이었다고만은 말 못하리라. 어쩌면 제 마음이 약했던 때문이라고 해야 정확하리라. 이번 달에도 팀에서 실적이 가장 나쁘다고 팀장한테 소리들은 건 둘째치고라도 수당이 얼마 안되니, 다음달 살기가 벌써부터 두려워지기 시작했던 참이었다. 그런 와중에 영주와 영미가 둘이 치고박고 싸우는 일이 잦아진 거였다. 그날도 감기몸살로 몸은 아픈데 큰아이들이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그러니까 제 언니가 큰소리로 노래 좀 불렀다고 팩 악을 쓰는 영미를 또 큰애는 노래 부를 자유도 없느냐고 따지고 들었고 말로는 당해낼 재간이 없는 영미가 그만 제 언니 머리채를 움켜쥐는 사태가 발생한 거였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안에 무서운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옛말에 서방복 없으면 자식복 없다는 말이 있기는 있지만, 그런 말 따위 무시하고 살고 싶지만, 현실은 영 무시할 수 없는 일들이,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였다. 더군다나 학교선생님이라고 하니, 만약에, 만약에, 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아이들 공부도 봐줄 수 있을 것이고 교육자이니 가정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더 이상 생계에 대한 공포로 떨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그것을 계산이라고 말한다면 굳이 부인하고 싶지 않을 생각들이 머릿속에 펼쳐지던 거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그 사람이 영주애비나, 동수애비 같지만 않으면, 그러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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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공선옥 /그림. 고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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