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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으로 널리 알려진 이연숙씨가 제8대 정무2

장관에 임명됐다. 장관 업무 5일째 되는 시점에서 이연숙 신임 정무

2장관을 만나보았다.

-장관직을 며칠 수행해보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민간활동이 더 힘

들어요. 정부는 예산이 있으니 일단 모금부담에서는 해방돼 있으니까

요. 여성문제는 관민, 여야를 초월해 같은 내용이니 다같이 밀어붙이

면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여성계 요구를 정부에 전달해야지요. 릴

레이 선수처럼 말입니다.”

-하필 왜 정권말기에 입각하냐고 안타까와 하는 의견도 있었지요?

“장관임명 받고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예요. 저는 지금이 가장

적기라고 생각해요. 뭐라고 해도 이번 정권은 여성이슈에서 변화가

가장 많은 시기였어요. 지금쯤에는 정부안에 들어와서 요소요소의 추

진상황을 여성의 눈으로 지켜볼 때가 되었고 장관은 그 일을 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지요. 여성사회참여 10대과제가 내실있게 추진되도록

하는 일에 비중을 두어야죠.”

-여협 회장을 하실 때 장관초청정책 간담회, 백초 발언대 등 반짝이

는 ‘작품’을 많이 기획하셨는데 국무위坪막關??창의성은 어떻게

발휘될 지 기대됩니다.

“남성들 시야에서 보는 것과 여성들이 보는 것은 아주 달라요. 여

성으로서 내가 본대로 느낀대로 전달하면 아주 창의적으로 보일 거예

요. 얌전한 장관하긴 벌써 틀렸지요?(웃음) ”

-창의적인 기질을 키우는데 도움이된 성장배경이 있었나요?

“아버지가 철도국에 다니셔서 전학을 아주 많이 다녀야 했어요. 변

화가 많은 생활에서 살아남으려니 터득하게 된 적응력 같은 게 있을

거예요. 새로운 환경에 아주 잘 적응해요. 방송진행, 여고 교사, 미

국공보원, 걸스카웃 대장, 캠핑지도자 등등 직업 경력이 다채로운데

항상 새로운 것과 끊임없이 부딪쳐야 하는 일들이예요. 모두 내가 찾

으려 했다기 보다는 그렇게 주어졌고 항상 ‘길리움을 받는다 ’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어요.”

-방송경력을 알려주시지요?

"60년대 KBS 라디오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재치문답> 시간에 재치박

사로 10년 이상을 출연했어요. 당시는 재치박사로 통하면서 인기가

좋았더랬어요. <동서남북>이란 시사프로에서 봉두완씨와 더블 엠씨,

70년대 유력 시사프로 <굿모닝>에서 주仄ㅎ씩?더블 엠씨를 맡았어

요. <외교사절을 찾아서>라고 주한대사 가족 인터뷰를 5년 정도 진행

했어요. <터놓고 얘기합시다>라는 프로그램도 했고 최근에 <시사토

론>을 진행 했어요. 전 방송을 하면 막 힘이 생겨요. 스스로를 좀 게

으른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방송을 하면 지식을 거저 얻는 기분이예

요. 그 덕분에 저는 ‘잡학’에 밝은 편이예요. 이런 방송의 재미를

즐겨요. ”

-여성계만이 아니라 남성들과도 폭넓은 교우관계를 맺고 계신 걸로

유명하시지요. 현재 소속돼 있는 모임을 알려주시겠어요?

“한번 만난 사람들을 계속해서 만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언론중

재위 홍일점 위원으로 서울25명을 포함한 50여명의 중재위원들과 늘

만납니다. 여자 혼자고, 나이도 있고 하니 다들 잘 해주지요. 한국유

권자운동연합의 공동대표를 지난 2년간 지냈어요. 전현직 국회의원,

장관, 민간단체장들이 정책토론하는 모임의 회원이고 가끔 사회도 봅

니다. 또 지역사회교육중앙협의회가 처음 만들어질 때 함께 했어요.

여기서 배출한 주부들이 지난 번에 주부전문인 클럽이란 걸 만들었지

요. 또 대학 때 활동했던 유謬봬玟剋訓을榮遊?아직도 만나요. 강원

도 고향모임도 있고요.모두들 오래 두었다 만나도 반가운 사람들입니

다. 이 오랜 인연들이 계속 새끼를 치면서 오래 유지되니까 아는 사

람이 많아지는 거지요.”(장관 임명후 정무2장관실로 배달돼 온 축하

난 화분은 2백개를 넘었고 비서실 책상위에 쌓여 있는 축하 전보는 7

백통이상으로 신임장관의 인기도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교우관계가 좋은 비결이 있습니까?

“친화력이 있는 편인지 사람들에게 친하다는 느낌을 주고 친했던 사

람들과 연계하는 일을 잘하는 편이예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배려예

요. 또, 거짓 없는 것이 중요하죠. 나이들면서 생긴 슬기가 하나 있

어요. 젊을 때는 싫은 사람에겐 싫다는 표시를 했는데 나이가 드니

싫어하는 사람은 피하면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세계여협대회에서 최다득표 이사로 선출될 만큼 영어와 국제적 리더

쉽이 뛰어나십니다. 국내에서 대학까지 나왔는데 영어를 잘 할 수 있

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전 원래 외우기를 잘하고 과학, 수학 쪽은 빵점이예요. 지금도 숫

자 중에 X Y가 섞여서 나오면 아무 것도 모르겠楮? 영어는 중1때

영어선생님을 잘 만나서 자신감을 가졌던 게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몇개 안되는 단어를 배우고서는 영어 연극을 한 이후는 영어 잘한다

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아주 못했어요.

60점대 수준이었고 대신 중학교 때는 기계체조 중 후프 대표선수로,

고등학교 때는 수영대표선수로 활약했지요. 한강 정도는 쉽게 왔다갔

다 했어요. 대학진학을 위해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어버렸어요. 잘 모

르겠으니까 통째 외어버린거죠. 또 전쟁 중에 대학을 가겠다고 결심

했을 때는 그만한 각오가 돼 있었기 때문이예요. 대학에 가서 잘 활

용했어요.이화여대 총학생회장으로 아시아청년반공대회라는 국제회의

에도 참석하고 유네스코 학생봉사대에도 참여했어요.”

-두 따님이 사회활동을 하나요? 친정어머니로서 뒷바라지를 많이 해

주십니까?

“마음 뿐이지요. 저는 어머니가 두 아이를 모두 길러주었는데 전 그

빚을 갚지 못했어요. 딸들이 오히려 어머니를 보살펴 줄 때가 많았지

요. 아이들에게는 한번도 과외공부를 시킨 적이 없어요. 대신 여행을

많이 시켰고 과외공부비용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유학을 보냈어요.

한번도 직장을 가지라고 해본 적이 없는데 스스로 알아서 자기일을

갖겠다고 했어요. 한양여전 교수인 작은 딸은 대학시험 두번 떨어지

고 한양여전에 들어가 우수하게 공부하고 모교 교수로 갔어요. 몬테

소리 교육자인 큰 딸도 단국대 천안캠퍼스에 입학한 후 국민대 편입

을 해서 우수하게 졸업을 했어요. 대학다닐 4년동안은 좋은 학교 아

니니까 기분 좋게 보내지는 않았을 지 모르지만 성격이 대신 좋아서

사람과 잘 지내고 자기 하고픈 일하면서 행복하게 사니까 전 자식교

육에선 성공했다고 자부합니다. 점수 조금 좋아지려고 과외공부시키

면서 창의성 말살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연숙 장관은 1935년 함경도 성진에서 출생했다. 여성신문사가 선

정한 명예평등부부이기도 한 이 신임장관은 부군 이충섭 씨와의 사이

에 2녀를 두었다. 전의원인 주부교실중앙회 이윤자 회장이 이 장관의

시누이 이기도 하다.

<김효선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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