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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해의 이미지는 하얗다.

365개의 빈 칸속에 채워야 할 날들이 많아서 하얗다.

그리고 새 해는 파랗다.

새로운 꿈에 부풀고, 새로운 계획에 부풀고.

그러나 1998년 새 해는 까맣게 다가왔다.

그것도 칠흑 어둠.

동서남북 어딜 둘러봐도 온통 까만 어둠뿐.

여기저기서 전화가 온다.

“무슨 희망적인 이야기는 없나요?”

“혹시 웃을거리는 없나요?”

먹통 정부가 5년동안 가위만 대량생산을 해놓은 덕분에 여기서도 싹

둑, 저기서도 싹둑.

그래서 사무실엔 웃음은 사리지고 눈알 굴리는 소리만 요란하다고

한다.

내 왼쪽 동료는 무사한지? 내 오른쪽 동료는 무사한지? 분주하게

쳐다보느라고.

...항상 웃음띈 얼굴의 여자가 있다.

이름은 공희정. 33세 미혼.

내가 남자라면 아내삼고 싶은 순위 넘버 원.

평소에 명랑하기가 동해바다에 떠오른 태앙같다.

아무리 더러운 쓰레기도 ‘꽃’으로 재생산해낼 만큼 가슴도 깊고

크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탁, 내려 앉았다.

푹푹, 한숨이 묻어난다.

“원유를 들여오지 못하면 엘리베이터도 멈추게 된대요. 20층 아파

트를 어찌 걸어다니나?”

“자동차도 다 팔아야 한대요. 분당에서 여의도까지 어찌 출퇴근하

나?”

“아파트도 이젠 연탄때야 한대요. 추운 겨울 어찌 살아가나?”

그녀의 한숨에 내 한탄을 보탠다.

“니 말 듣고보니 우리 국민이 모두 연탄같다. 슬픔과 허탈로 시꺼

멓게 되어버린 연탄.”

연탄, 말을 하다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연탄이 꺼지면 번개탄으로

불을 붙이던 추억.

정말이지 부엌아궁이를 열어보다가 연탄이 새까맣게 꺼져 있으면 절

망 그 자체였다.

그 때 나를 절망에서 구해주는 건 언제나 번개탄.

까맣게 꺼져있는 연탄을 새빨간 불로 활활 타오르게 해주던 번개탄

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번개탄을 떠올린 순간 나는 한숨에서 웃음으로 U턴을 했다.

“얘, 우리라도 번개탄이 되자. 연탄에 불을 붙여야 세상이 따뜻해

질거 아니냐?”

그녀의 목소리도 어느새 하이 소프라노로 냉큼 올라가 있었다.

“어머, 정말 그러네요? 우리 모두 번개탄이 되어 뜨겁게 일하면 살

길이 보이겠죠?”

...아픈 사람에게 정작 필요한 건 약보다는 우선 희망. 우리의 현재가

참담한 건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후엔 조대혁 이사한테 전화가 왔다.

우리나라 잡지계의 대부격인 그가 침울하게 말했다.

“요즘 웃어 본지가 하도 오래돼서 전화했습니다. 웃음기능 좀 찾아

주십시오.”

나의 대답은 동문서답.

“우리나라엔 3대 다이빙이 있어요. 심청의 솔로 다이빙, 논개의 더

블 다이빙, 삼천궁녀의 그룹다이빙.

이제야말로 우리는 4천만 그룹다이빙 시범대회라도 열어야 하지 않

겠어요?”라고.

너도 넘어지고 나도 넘어지고, 너도 텀벙! 나도 텀벙!

“10가구 중 8가구가 파산할 것 같다”는 체감온도에 이번 겨울이

더욱 을씨년스럽다는 신문보도.

GNP 만불시대에서 GNP 3천불시대로 급강하 해버린 현실의 어이없

음.

너무 위로 치솟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건 더

문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저 허공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끝나버리기 전에는 무엇이든 불가능하다고 단정짓지 말라.”(키케

로)

“절제와 노동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두개의 처방이다”(장 자크

룻소)

두 사람의 말에 한껏 볼륨을 높여 금수강산을 채우고 싶은 심정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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