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를 찾아 미국으로 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그 곳 직장 생활이 너무 따분해서 못 견디겠다는 하소연부터 대뜸 늘어놓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직장 동료들과 어울리는 낙도, 퇴근 후 친구들과 한 잔 하는 재미도 없다는 얘기였다.

아닌게 아니라 일과가 끝나면 곧바로 퇴근해 가족과 어울리는 것이 미국의 직장 생활. 매일 매일이 새로운 일과 사건의 연속인 우리 직장인들이라면 우선 무료하다는 생각부터 들 법도 하다.

그런 미국 직장인상 역시 직장 환경의 산물이란 것을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미국 직장인들과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그들 역시 우리처럼 떠들썩하게 지내고 싶어 하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한 미국인은 일과 후에 가볍게 한 잔 하는 것조차 경제적으로 부담스럽다고 했다. 우리처럼 회사 돈이나 술 대접으로 공짜 술을 마실 기회가 아예 없어서다. 나는 살풍경해지는 요즘 우리 직장 생활을 마치 기쁜 소식이라도 되는 양 그 친구에게 전했다. “너무 억울해 하지마. 우리도 점점 더 그 쪽 하고 비슷해지고 있어.”

우리 직장 생활과 가정 경제에서는 이미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가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혁명적 변화를 간파하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변화를 수입과 지출 면으로 나눠서 생각해보자.

우선 수입 측면의 변화는 재테크 환경의 변화와 구조 조정의 일상화에서 비롯됐다. 과거 같으면 금융 자산이나 부동산, 주식으로 봉급 외의 수입을 올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초저금리 시대인 지금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처지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는 구조조정으로 일자리가 전에 없이 불안해졌다. 수입 면에서 보자면 유일한 수입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상태가 됐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저축하고 집도 사고 아이들 과외까지 시키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봐 왔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하고 오랫동안 의문을 품어 왔다. 월급 명세서 상의 수치만으로는 도저히 짜 맞추기가 불가능한 데다가 무작정 순진하게 위대한 한국 주부의 승리로만 이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이 불가사의에 ‘중산층 미스테리’라는 이름을 진작에 붙여뒀다.

미스테리의 해답은 의외로 쉽게 구할 수 있다. 우선 회사가 직장인 개인의 경비 상당 부분을 부담해주기 때문이다. 접대비·판공비·기밀비·품위유지비·회식비·복리후생비 등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가계 지출의 일부를 회사가 부담해주는 것은 우리의 오랜 관행이었다. 그리고 접대와 향응, 뒷돈 같은 부정부패도 한몫 해온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눈먼 돈’이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지출 면에서 가장 큰 변화다. 성과급과 연봉제가 보편화되면서 오늘날 회사 돈으로 지불되는 경비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부정부패가 줄어들고 신용카드 사용이 느는 것도 그런 추세를 부채질하고 있다.

그러니 일과가 끝나면 조용히 가정으로 향하는 일이 이제 더 이상 남의 나라 얘기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5년 후 미국에서 돌아올 내 친구는 그 때쯤이면 문화적 충격을 거의 느끼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방희/경제 칼럼니스트 MBC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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