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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순 목사/ 한국부스러기복지선교회 대표

우리 부부는 평등부부상을 받고 난 뒤에 더 평등해졌다. 사실은 1회 평등부부상을 받았지만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문패에 두 사람 이름쓰기, 재산공동명의, 가사노동의 평등함 때문이 아니었다. 산동네, 판자촌에서 시작하여 1995년까지 가난한 사람들을 잘 섬기며 함께 사랑을 나누고 독재정권아래 민주화와 빈곤한 아동, 청소년들의 권리를 위해 함께 고난을 평등하게 받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평등부부상을 받은 후 크게 반성했다.

평등부부상은 우리에게 칭찬이 아니라 족쇄(?)이며 채찍질(?)이었다. 무엇보다 형식적인 평등보다 삶의 질 즉 내용적인 평등을 강조했기에 자유로웠던 것들이 우리의 생각 속에서 “우린 평등부부니까!”라는 말을 입밖에라도 내면 그 자유로움이 안개 속에 갇혀버렸다.

늘 교회 사택에 살거나 햇빛 한번 들어오지 않는 판잣집 혹은 지하 셋방이라 문패 달 일이 없었고 재산이라고는 그 달 벌어서 그 달에 다 쓰게 되어 있어 공동 이름으로 된 통장 관리할 일이 없고, 매달 생리휴가 하루를 받아 제일 배가 많이 아프고 우울한 날은 밥도 빨래도 하루종일 안 하도록 식구들의 협조를 받은 상태였다.

한 가지 숙제가 있었다면 가사노동 부분이었다. 결혼 20년(상을 받을 당시) 세월동안 다양한 투쟁과 해결방안 모색과 끝없는 타협과 좌절 속에 터득한 것은 가장 큰 적은 나의 완벽주의와 고집스런 청결, 정리정돈임을 깨닫고 이미 하산(?)을 해 능구렁이가 된 터이라, 밥 먹기 전에 무노동이면 무식사(예를 들면 숟가락이라도 놓아야 밥 준다!) 그리고 집안 청소는 더럽다고 느껴 하고 싶은 사람이 하기, 빨래 또한 이하동문이었다. 기껏 피곤하고 힘든데 죽도록 치우고 쓸고 닦고 식구들에게 짜증내며 평등노동을 요구해야 나만 성질 더러워지고 우스운 꼴이었다.

평등을 요구하면 내가 더 많이 가사노동을 할 판이었다.

평등부부상을 받고 TV며 신문, 잡지에서 인터뷰를 할 때 남편보고 설거지하거나 빨래를 널고 다리는 모습을 찍자고 했을 때 우리는 정말 당황했다. 그래서 노동 시간이나 형태의 평등이 아닌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래도 가부장제도의 찌꺼기는 남아있어서 내 사랑하는 남편은 내가 짜증내거나 평등함을 요구할 때마다 잘 참고 견디다가 드디어 반격을 시도했다. 자신이 목사이므로 부인도 평등하게 목사직분을 받도록 훈련받고 신학공부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강남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늦깎이 공부를 시작할 때도 공부하기 싫어 책만 봐도 머리에 쥐가 났던 나에게 평등부부임을 강조했다.

드디어 인간승리!! 우리는 평등하게 둘이서 해냈다. 졸업도 하고 여자 목사로 감리교회에서 안수도 받았다. 나는 결식·빈곤아동을 위해 한국부스러기복지선교회에서 일하고 남편은 경로식당을 운영하며 노인복지선교를 하고 안산 제일감리교회에서도 공동목회를 한다.

우린 정말 평등부부상을 받고 난 뒤에 더 평등해졌다. 평등부부상을 주셔서 우리 부부는 더 사랑하고 더 새로워져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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