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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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승희는 <남자들은 모른다>(마음산책)에서 최승자의 위의 시 ‘일찌기 나는’을 “한국여성시사에서 여성 자서전적 인식의 창세기가 될만한 작품”이라고 했다. 또한 “아버지의 이름이 나를 ‘호명’하여 ‘호명된 주체’ 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기획 자체가 가부장적 음모이며 여성의 주변화라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고 덧붙인다.

여성문학은 어느새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진 ‘가부장제’를 읽어내고 그것을 뛰어넘고 뒤집고 해체하는 데서 출발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고 (중략)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허무하다 그치?)” -최영미의 ‘어떤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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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공선옥, 고정희, 토니모리슨, 최영미, 김승희.

이처럼 당연시되었던 역사로부터의 여성의 배제를 자각하기도 하고 여성 욕망을 억압하는 사슬을 풀어헤치기도 한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중략)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김선우 ‘얼레지’

김승희는 여성문학을 “우리 사회의 문화 질서가 여성들에게 부여한 젠더를 해부하고 뒤집고 그것을 전유하여 전복시키기를 꿈꾸는 푸른 힘의 문학”이며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하는 문학이고 반어와 역설의 언어이며 정전 해체의 시각과 정전 뒤집기의 언어를 가진 유쾌한 문학”이며 “지엄한 레디메이드 여성담론에 균열을 일으키고자 하는 위반의 문학”이라고 한다.

김승희, “뒤집기 언어 가진 유쾌한 문학”

‘아버지, 나를 주변인으로 호명’ 인식

말할 수 없던 불편부당 드러나는 통렬함

아버지가 말해주지 않았고 어머니가 말할 수 없었던 것이 말하여지는 것에 맞닥뜨렸을 때 느껴지는 통렬함이란…. 불편 부당했지만 남성의 언어 안에서는 그게 뭔지 명확치 않았던 것이 여성의 언어로 말하자 분명해진 데 대한 시원함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역시도 과정에 있는 여성의 언어를 찾아가기란 쉽지 않았다. 소수자의 인권이나 파쇼, 제국주의에 대해 치열한 저항을 했던 남성 작가들조차 성 억압으로 신음하는 여성들을 외면했다.

“여기 울고 웃는 우리 몸이 있습니다. 맨발로 수풀 위를 춤추는 몸이, 그것을 사랑하십시오. 열렬히 … 저자들은 우리 것을 경멸하지요. 단지 이용하고 포박하고 질식시키고 그 다음 내팽개칩니다. 두손으로 만지고 토닥거려 주세요.”라고 흑인 여성들을 상대로 격정적인 설교를 토하던 토니 모리슨도 “치맛자락 휘날리며 휘날리며/ 우리 서로 봇물을 트자/ 옷고름과 옷고름을 이어주며/ 우리 봇물을 트자/ 할머니의 노동을 어루만지고 / 어머니의 모습을 씻어주던/ 차랑차랑한 봇물을 이제 트자”던 고정희도 여러 층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또 넘어야 했다.

남성중심 사회가 놓은 허들을 앞에 둔 여성문학. 모두 넘고 넘어, 다 뒤집고 헤쳐 더 이상 여성문학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지은주 기자 ippen@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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