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특집 인터뷰-항일애국지사 최순덕 할머니

백지동맹사건 주도 광주시민 존경 한몸에

56주년을 맞는 올해 광복절은 우리 모두에게 일제 36년간의 상처가 더 아프게 되살아나는 해가 될 것이다. 역사교과서 왜곡, 일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시위 방해 등 아직까지도 일본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적인 상처를 유난히 많이 간직한 광주는 전국적으로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촉발시켰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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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광주학생들은 독서회, 비밀결사광주학생소녀회를 조직해 일제에 적극적으로 항거했다.

전남매일 한송주 논설위원은 “여학생들의 투쟁이 매우 치열했다”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백지동맹 사건은 당시 교육풍토상 상상도 할 수 없는 격렬한 의사 표명이어서 일본인 교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전국의 여학교 항일운동으로 확산되는 기폭제가 되었다”고 전했다.

47명의 여학생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던 백지동맹 사건을 주도했던 최순덕 할머니는 광주시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대표적인‘어른’이다.

그러나 정부로부터 이 사실을 인정받지 못해 안타까움을 유발하고 있다.

일제에 맞서 백지동맹 주도한 최순덕 할머니

“백지동맹이 여학생 항일운동 불 붙였어”

올해 구순이 넘은 최순덕(91. 광주시 서구 화정1동) 할머니는 이번 광복절이 착찹하기만 하다. 전국 항일학생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광주학생독립운동 중에서 여학생들이 일으킨 항거로 가장 유명한 백지동맹의 주모자였던 최 할머니는 그동안 여러차례 항일유공자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광복절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도 정부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3일 광주에서 만난 최 할머니에게 서훈 신청 결과를 묻자 “나는 개인적인 포상을 원하는게 아니야, 그저 후손들에게 백지동맹 사실이 정확하게 전달되고 그 날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 달라는 것 뿐이야”라며 단호했다.

인터뷰 내내 최 할머니는 “국경일로 해준다면야 보상 안받아도 한나 서운한 맘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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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학생 석방 요구하며 학기말 시험 거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던 1929년에 최 할머니는 광주여고보 3학년 학생이었다. 백지동맹사건이 일어나기 며칠전 나주역에서 일본학생이 하교하던 한국여학생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자 이를 보던 한국남학생들이 집단으로 항의하던 것이 도화선이 돼 11월 3일 광주역에서는 학생들이 대규모 항일 시위를 벌였다.

당시 급장을 맡고 있던 최 할머니는 여고보 학생들을 광주역으로 인솔해 치마에 돌맹이를 싸들고 다니며 시위에 참여했다. 일본경찰들이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일본 학생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폭행을 가해 최 할머니는 허리를 다쳐 지금까지 통증을 안고 생활하고 있다.

최 할머니는 광주역 시위가 끝나고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자 광주고보 학생인 이경채와 학기말시험을 거부하자는 백지동맹을 결의하게 된다.

“그 때는 울던 아이도 일경이 온다면 울음을 그친다는 무서운 시절이였지. 일본의 서슬퍼런 칼날이 우리를 향해 있던 때 우리는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 셈이지. 그 때 시험을 거부하며 백지동맹을 모의한다는 것 자체가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

할머니는 여고보 학생들에게 전달할 호소문 초안을 급히 작성해 교복 속에 감춘 채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인력거를 타고 같은 반 친구였던 박지의 집으로 향했다.

“아마 그 친구 고모네집 골방이었던 것 같애. 친구에게 사정 얘기를 했지. 그 친구와 함께 150장이나 되는 결의문을 일일이 손으로 썼지. 밤을 꼬박 새웠어.”

학기말 시험 당일 새벽 학교에 도착한 최 할머니는 전 교실을 돌아다니며 결의문을 돌렸다. 그리고 교실마다 뛰어다니며 ‘연필도 들지 말 것, 한 글자도 쓰지 말 것’을 칠판에 썼다.

“일본 교사들 눈을 피해 쓰다가 교사가 오면 얼른 가서 지우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지. 속으로는 무서운 심정으로 다녔어.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찡해.”

그래도 답안지를 작성하던 친구들을 보고 화가 난 친구 이광춘이 급우들에게 운동장으로 나가자고 외쳤고 이 후 최 할머니는 운동장에 모인 전교생들과 일주일 동안 입실을 거부하며 ‘구속된 조선학생이 석방될 때까지 시험을 거부하자’며 농성을 벌였다.

나는 개인적인 포상을 원하는게 아니야

후손들에게 백지동맹이 정확하게 전달되고

그 날을 국경일로 제정해 달라는 것 뿐이야

백지동맹 사건 이후 최 할머니는 가택수색을 나온 일본경찰을 피해 친구 집에서 3개월 동안 숨어지냈다. 그리고 11월 17일 동료학생들 중 최초로 무기정학을 받았고 결국 강제 퇴학당하고 말았다.

화순에서 서당을 운영하던 최 할머니의 아버지는 “서당공부면 됐지 무슨 학교냐”며 초등학교 입학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 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서 아버지에게 많이 졸랐지. 그래도 끄떡없던 아버지는 내가 심하게 앓자 결국 학교에 보내주셨지.”

그래서 10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최 할머니는 그 어린 나이에도 중국상점에서 물건을 사지 말자며 동네사람들에게 외치고 다니던 당찬 소녀였다.

“당시에 어째 그런 생각을 했나 몰라. 그 때는 주변에 중국인들이 성냥, 비누, 물감, 양잿물 같은 것을 아주 싸게 팔았어, 고급품은 또 아주 비싸게 팔았고. 그러니까 한국상점에 사람들이 안가는 거야.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어렸을 때도 들었나봐”

최 할머니는 “이런 성향은 모친의 영향이 컸다”고 전한다. “우리 어머니는 맺고 끊는 게 분명했지. 불의에 타협하거나 굴하지 않았고 좋은 일이라면 솔선수범했어. 고등학교도 아버지 몰래 어머니가 보내주셨어.”

“내가 죽어도 사실만은 밝혀졌으면”

최 할머니는 지난 1954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의 공로를 인정받아 광주여고보의 후신인 현 전남여고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23살에 결혼 8남매를 둔 최 할머니는 나이 오십에 남편과 사별할 때까지 남편에게도 독립운동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그러나 할머니의 마음 한 켠이 늘 불편했던 것은 다름아닌 백지동맹의 주모자가 광주여고보 친구 이광춘으로 외부에 알려진 사실

이다. 현재 나주에 거주하는 이광춘 할머니는 지난 1996년 독립운동건국포장을 받고 유공자 명단에 올라가 있다.

당시 최 할머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광춘아 축하한다. 잘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전화할 때까지만 해도 별로 그런 마음이 없었는데 광춘이가 그러지 말고 내가 도와줄테니 유공자 신청을 해보면너도 상을 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한 마디에 갑자기 마음이 울적해지더만.”

최 할머니의 행적이 묻힐 수 밖에 없던 것은 친구 박지의 아버지가 사건을 축소해 조용히 처리할 수 있도록 각계에 청을 넣었기 때문이라고 명예회복추진위원회는 전했다.

당시 광주면 부면장과 광주여고보 사친회장을 맡고 있던 친구 박지의 아버지 박계일씨가 자신의 집과 자신의 딸이 백지동맹 사건에 관련해 구속을 면하도록 사태를 수습하면서 최 할머니의 일까지 덮어진 것이다.

그리고 당시 기자들의 취재 과정에서 친구 이광춘이 처음부터 저지른 일로 보도됨에 따라 백지동맹의 주모자가 바뀌게 된 것이다.

8남매를 키우면서도 광주 내 가난한 사람을 돕는 단체인 빈첸시오 활동을 하고 있는 최 할머니는 1970년대에 천주교회 신협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생활자금을 대부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구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6·15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고문,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장기수 후원 활동을 놓지 않고 있으며 범민련 광주지부 행사 등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내가 죽고 없어도 사실만은 밝혀졌으면 좋겠다”는 최 할머니는 “그래도 나를 위해 애써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로 섭섭함을 애써 감췄다.

광주박정 희경 기자 chkyung@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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