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시현/웹진<@zooma>기획위원

얼마 전에 친구가 전화를 해서 열변을 토한다. “팔, 다리, 허리 다 빠질 거 같다. 솔직히 슬픈 생각보다도 내내 억울하고 화만 나더라.” 시아버지 상을 치른 친구는 3일 내내 일만 죽어라 했더니 고인에 대한 애도의 마음은 들어설 틈도 없고 그저 화만 나더란다.

친구 얘기를 들으니 4년 전에 상을 치렀던 내 경험이 생각난다. 그때 이후로 서양영화에 장례식 장면이 등장하면 어떻게 하는지를 유심히 보게 되었다. 내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가장 불쾌하고 화가 났던 때는 명절 때, 시아버지 장례식 때, 그리고 시동생 결혼식 때이다. 가장 즐겁거나 가장 엄숙해야 할 때 웬 불쾌감?

먼저 명절 때 화가 나는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으로 점철돼 있는 날들이 바로 명절이니, 말해 무엇하랴. 다음은 장례식. 나는 4년 전에 시아버지 상을 치렀다. 요즘은 집에서 손님대접을 하지 않아도 되고 상을 치르는 날도 짧아져서 예전보다는 훨씬 편해졌다고들 얘기한다.

하지만 여성들을 차별하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시아버지 영전이 모셔져 있는 병원 영안실에 도착한 그 시간부터 남자와 여자는 철저하게 다른 경험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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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영안실 앞에 있는 명패에 씌어진 이름들을 보고 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곳에는 아들과 사위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며느리의 이름을 적어달라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사위이름은 적혀 있으면서 딸들의 이름이 빠져 있을 수 있는가. 손위 시누이에게 화가 나서 얘기를 했더니 그냥 웃고 만다. 남자들은 검은 양복으로 갈아입고 영안실에 들어가 손님들을 맞는다. 여자들은 흰색 한복으로 갈아입고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 이때 느꼈던 모멸감을 잊지 못하겠다. 단지 남자들에 비해 힘든 일을 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양복을 깨끗이 차려입고 정중히 손님을 맞이하는 권리를 가진 그들과, 몸에 맞지도 않는 한복을 추스르며 자신의 아버지 또는 시아버지 가시는 길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지도 못하고 손님들 음식 뒤치닥거리에 땀을 뻘뻘 흘려야 하는 이 엄청난 차이 때문이었다. 시아버지가 아닌 내 친아버지였다면 내가 느꼈을 분노는 더 했으리라. 사흘 내내 난 시아버지에 대한 슬픔보다는 여성에 대한 이 엄청난 차별과 억압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어야 했다. 그 뒤로도 내내 딸과 며느리는 늘 뒷전에서 없는 듯 보여야했고 그러면서도 온갖 힘든 일은 다 감당해야 했다.

시동생의 결혼식. 그때도 역시 내가 ‘여자’라는 걸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었다. 시동생의 결혼식이 치러진 후 시집으로 가서 그 많은 손님들을 대접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가족행사라면 지긋지긋하다고. 나도 시아버지 가시는 길을 제대로 보내드리고 싶었고, 시동생 결혼식을 기쁜 마음으로 치러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느끼기에는 내 앞에 있는 현실이 너무 버거웠다.

손위 동서는 지금도 시할아버지 상 치를 때의 얘기를 한다. 그때 자신은 임신 말기였는데 며느리가 자기 혼자여서 손님 치르는 일을 거의 다 맡아했다는 것이다. 일을 하다가 너무 힘들고 억울해서 방에 들어가 혼자 엉엉 울었다 한다. 그리고 결국은 그 노독으로 조산을 하게 됐다. 여러 명의 멀쩡한 장정들은 다 놔두고 임신 말기의 여자 한 명이 그 일을 감당하게 만드는 현실이 기가 막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큰 일을 치러야 할 때,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 가장 힘들어지는 건 여자들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기본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들이 먹고 치우는 일인데 그 일을 온전히 여자들에게만 맡겨두니 그럴 수 밖에. 그러면서도 자기 부모님을 보내는 길에서조차 딸자식이 사위보다 순위에서 밀려나야 하는 ‘무한한 의무와 무권리의 상태’그것이 지금의 여성들의 현실이다.

명절, 장례식, 결혼식은 여성차별이 가장 극도로 집약되고 표출되는 때이다. 그러면서도 즐거운 날이니까, 슬픈 날이니까라는 명목으로 그런 차별을 은폐해버리고 어떤 변화도 꾀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도 바로 이때이다. 이런 가운데 그 안에서의 여성들의 경험은 그냥 그 마음속에서만 꼭꼭 자물쇠에 잠겨 숨겨지고 있을 뿐이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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