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을 미투(Metoo·나도 말한다) 정국 속에서 다시 만난다. 김명순의 삶과 문학세계는 여성신문 2016년 1월 14일자(1373호)에 보도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글을 쓴 김경애 전 동덕여대 교수는 미투 고발자인 김명순의 삶을 통해 ‘사나운’ 한국사회가 이제는 변화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편집자

 

김명순은 이응준으로부터 데이트 강간을 당했으나 가해자가 이를 부인하는 가운데, 동료 문인 등 주변인으로부터 2차 성폭력을 당하면서도 홀로 이를 헤치며 살아나갔다. 김명순은 자신의 첫 직장이었던 『매일신보』에서 남자 동료들로부터 직장 내 성희롱을 당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기자 생활을 해나갔다. “명순은 날카로운 표정과 지성적인 말솜씨로 뭇 기자들의 허튼수작을 받아넘기며 재빠르게 기사를 쓰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언론이 가하는 성폭력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했는데, 김기진의 글 「김명순에 대한 공개장」에 대해 김명순은 이 글의 “사실이 전부 틀리고 없는 말을 조작한 것이 많고 전부 앞뒤가 맞지 않아 모순뿐인 것을 들어 부인하는” 내용의 반박문을 투고한다. 또한 잡지 『별건곤』에서 위선적인 독신주의자로 매도하자, 김명순은 이에 대해 글쓴이 방정환과 차상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 이 기사에는 그 전에 김명순을 처녀가 아니면서 처녀시인이라고 자칭하는 “죽은깨 마마님”을 처녀 아닌 짓을 하는 사람이라고 기재했더니 김명순이 찾아와 “왜 그럿케 정직하게 내엿느냐”고 “나는 이 세상에 행세를 못하게 되엿다”고 울며불며하다가 나중에는 목도리로 목을 매고 죽는 형용까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명순은 자신에 대해 성폭력을 가하는 기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의한 것이다. 1933년에는 김명순이 동경에서 생계를 위해 낙화생(땅콩)을 팔다가 일본 남자에게 무수히 구타를 당했다는 기사에 대해서도 사실무근이라며 경찰에 또다시 고발한 것으로 보인다. 김명순은 자신의 신상에 대한 잘못된 언론 기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자신에 대한 오해를 벗고 해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상처 극복 위해 온 힘 다하지만…

그녀는 수필에서도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피력한다. 수필 「네자신의우헤」에서 김명순은 자신의 아명 탄실이를 부르며 “눈물을 거두라”고 하면서 이제 한번은 단지 너를 위하여 일어나보자, 모든 것을 저버리고 모든 인정을 물리치고 “이제다시 이러나자”라고 격려한다. 또한 수필 「렐업는이약이」에서 “당신들은 나를비웃기전에 내운명을 비우서야올흘 것이다. 나는이디경에 겨우이르럿서도힘잇는대로 싸와왓노라”라고 하며, 1924년에 발표한 자신의 아명을 제목에 붙인 그녀의 시 「탄실의 초몽」에서도 “온 하늘이 그에게 호령하다/ 전진하라 전진하라”고 노래하여 절망 속에서 “자신의 길을 굽히지 않고 나아”가겠다고 스스로를 북돋운다. 이에 앞서 소설 「칠면조」에서 자신의 상처에 대해 슬퍼했지만 “얼마나 힘써사윗느냐 얼마나 상처를 바닷느냐 네몸이훌훌다벗고 나서는날 누가너에게 더럽다는말을 하랴?”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자신이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1925년에 여성 작가로서는 최초로 작품집 『생명의 과실』을 발간하면서 머리말에 “이 단편집은 오해받아온 젊은 생명의 고통과 비탄과 저주의 여름으로 세상에 내노음니다”라고 고백했는데, 그녀의 글쓰기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이를 통해 그녀는 스스로를 치유한다. 또한 생명의 열매를 세상에 내놓은 일은 자기 인식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의미 있는 것이다. 이어 1928년에는 또 다른 작품집 『애인의 선물』을 출간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희망을 꿈꾼다.

한사람의 지극한 열성을 다한 이상이 그 자신의 일생가운데 어데서던지 실현되고야말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잘못 생각하였었다. 역시 나는 내 이상을 실현하고자 간단없이 붓을 잡을 것이다. .. <너희들아아모리곤란하더래도희망하여라! 보앙카레>하고 굴고 튼튼히하얏다. 겨울 날 맑은 빛이 빛나듯이 그의 눈에는 청신한 빛이 빛났다.

스스로 자신을 격려하면서 희망을 꿈꾸고 작가로서의 의지를 불태우며 자신의 꿈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어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애(사랑)은 무한대한 것이니 아름다운 K양(김명순을 지칭함)이 혼탁한 사회에서 아름다운 구원의 여성”이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읽고, 이 편지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면서 자살하려던 생각을 거둔다.

김명순이 활동할 당시 김명순에 대해 호의적으로 쓴 글은 춘해(최서해)가 1925년에 쓴 글이 그 시초다. 춘해는 김명순에 대한 김기진의 공개장을 비판하고 김명순을 동정하면서 귀한 여류 문사인데 아끼고 북돋아 줘야 하며, 김명순이 열심히 글을 쓰기를 바란다는 글을 발표했다. 김명순이 악의적인 소문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일본 유학하던 1933년 다시 김명순에 대한 호의적 글이 등장했다. 이 글에서는 김명순이 동경에서 밤에는 행상을 하는 데 칫솔, 치약, 양말, 조선 엿과 낙화생 같은 과자를 팔아서 학비를 조달하여, 프랑스 문학과 음악공부를 하기 위해 프랑스에 유학 가려고 ‘아테네, 후란쓰’라는 불어학원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며, 뛰어난 재능으로 선생님과 동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음을 전하면서, 어려운 가운데에서 꿋꿋하게 공부하는 김명순이 곧 “찬란한” 명성을 떨칠 것을 기대했다. 또한 청노새는 김명순의 시가 매우 슬프다고 하고, 이는 슬픈 로맨스로 인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김명순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남편 많은 처녀”라 조롱한 김동인

홍효민은 『문단측면사』에서 김명순이 스캔들에 있어서 “이렇다 할 아무런 사건은 없었으며 영어와 불어가 가능하다”라고 쓰고 있다. 안석영은 『조선문단 삼십년 측면사』에서 김명순의 전성기 활동을 언급하고 현재의 쇠잔한 모습을 애틋한 시선으로 묘사하면서 여전히 원고를 써가지고 다니는 의지를 높이 사며, 김명순을 모태로 하는 후대 여성문인들이 김명순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비판했다. 또한 임종국과 박노순은 “그녀를 익히 아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하기를 악의 없고 선량하나 자만심이 강”하였고 “창부 타입 여성이 아닌 성적인 면에서는 지극히 담백”했다는 것으로 입을 모은다고 증언한다.

김명순은 40살이 되던 1936년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국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쓴 수필 「귀향」에서 그는 “일생을 통하야 못이저지는 그피압흔경험을 갓자고생기어나서 공부하고 일하고 고난당하든일들이 거운눈물을 하염업시 자나내고야맘니다”라며 데이트 강간과 그 이후 겪었던 고생을 회고하면서 울었다고 쓰고, 일생을 통해 늘 슬픔에 젖어 살고 있음을 드러낸다. 김명순이 “순결치못한” 처녀가 된 사실이 알려져 기독교가 설립한 학교로 부터 제적당하고, 또한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의지하고자 했지만 가톨릭교회에서도 경원시 되면서 신앙을 버리게 된다. 보수적인 근대 기독교가 유교 이데올로기와 결탁해 성폭력의 피해자인 김명순을 여성에게 요구되는 정절의 윤리에 반하는 존재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명순은 세 번째 유학 끝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올 즈음 다시 기독교 신앙을 회복했는데, 자신이 다니는 교회는 “내가마음먹기는/음향과색채의서안(西岸)을전(傳)하야/착한이들의교회당”이라고 하여 더 이상 자신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지 않는 착한 이들이 모여 있는 교회라고 쓰고 있다. 이미 40대에 접어든 김명순은 비로소 성적 대상에서 벗어나 주변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게 된다. 또한 김명순은 일본을 방황하다 마른 몸으로 돌아와서 매주 성당에 다니며 누리는 신앙생활의 기쁨을 고백한다. 김명순은 성가를 부르고 새벽 미사 때 파랑새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모든 허물을 구하시라고 미사를 드렸으며, 베드로(페드루)를 전 생애의 외로운 동무로 의지한다고 노래한다. 그리하여 김명순은 서녀로 데이트 강간을 당하고 조선 사회로부터 받은 2차 성폭력으로부터 생존자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승승장구하며 육군참모총장 된 이응준

그런데 1939년 김동인이 또다시 「김연실전」을 연재하기 시작하고, 성도덕 의식이 전혀 없는 주인공 김연실이 김명순을 모델로 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김명순은 또다시 2차 성폭력에 맞닥뜨려야 했다. 김명순은 같은 고향사람이고 오빠의 친구인 김동인을 “봇쨩 봇쨩”하며 찾아가 염상섭이 자기에게 성희롱하는 것을 어떻게 물리쳤다고 이야기하는 등 친밀한 고향 오빠와 같은 사람으로 대했으나, 그는 김명순을 다시 곤경에 빠뜨리는 소설을 쓴다. 김명순은 이 소설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 없이 조선 사회에서 사라진다. 김동인은 그 이후에도 김명순을 “남편 많은 처녀”, “영업적 매녀(賣女)아닌 여인”이라고 비하하고 조롱한다.

그 후 김명순이 일본에서 귀국했을 때 이병도가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하며 문학사를 정서하게 하다 중일전쟁 말기에 김명순을 일본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병도는 김명순이 자신의 집에 기거하던 때 절망하여 울던 모습을 회상하는데, 김명순이 이때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김명순은 이때 도쿄 조선 YMCA 뒤뜰에서 양자와 함께 동포들과 기독교 기관을 찾아 한푼 두푼 동정을 받아서 살았고, 닭을 쳐서 생계에 보태며 살다가 결국, 정신병이 심해져 강제로 아오야마(靑山) 뇌병원에 수용돼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명순이 2차 성폭력으로 온갖 고난을 당하며 외롭게 살다가 결국 정신이 이상해져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되고 사망할 동안, 가해자 이응준은 항일독립운동가 이갑이 조선독립을 위해 발탁해서 군사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일본 육사에 유학을 보냈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은 3.1운동 이후 독립군부대에 합류했으나, 일본의 군대에 남아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훈3등의 훈장을 받았고, 해방 후 대한민국 수립과 동시에 초대 육군참모총장에 발탁됐고 1955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으며 그 이후, 체신부장관을 역임했고, 인촌문화상을 수상했고 국립묘지에 묻혔다. 가해자 이응준은 평생 승승장구하면서 일제와 한국사회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김명순은 시 <유언>에서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할 때/.../죽은 시체에게라도 더학대하더구/그래도 부족하거든/이다음에 나갓튼 사람이나드래도/할수만잇는대로 또 학대해보아라/그러면서서로믜워하는 우리는영영작별된다/ 이사나운곳아 사나운곳아”

라고 시를 남겼다. 한국 사회는 그의 유언과 같이 김명순의 죽은 시체에게도 “학대”했고, 또 후대 성폭력 피해자에게 “학대”했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여전히 “사나운 곳”이다.

이제 여성들이 ‘#미투’(Metoo)로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용기를 내는 것은 더 이상 우리 사회가 그들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위드유’(Withyou(라고 외치며 여성과 남성들이 함께 더 이상 우리 사회가 “사나운 곳”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사나운 곳”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 굳건하게 함께 해야 할 것이다.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도 우리와 함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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