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눈 속에서 희망 찾았다

인도를 생각하니 무수한 단상이 떠오른다. 지금도 인도의 향냄새가 코 끝에 느껴진다.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도 인도의 하늘과 맞닿아 있겠지. 여행할 때는 참 고생 많이 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인도를 그리워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처음 인도를 가겠다고 했을 때 남편은 반대했다. 위험하다는 것이다. 차라리 다른 나라를 가라고 했다. 여러 차례 얘기를 하다가 다른 곳을 가기로 했다. 비자 내고 항공권도 예약했다. 그런데 인도가 자꾸 날 붙들고 놔주질 않았다. 결국 예약했던 항공권을 취소하고 나는 인도로 갔다.

내가 인도로 배낭여행을 간다고 하니 주위에서 하는 말

“니네 신랑이 허락(!)해 줬어? 보내준대? 야, 니네 남편 정말 대단하다. 누가 자기 마누라 한 달씩이나 여행 보내주니? 남편이 밥도 해먹어야겠네? 너 정말 팔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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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나부르 마을 주민들.

글쎄 듣기에 따라서는 남편 칭찬일 수도 있지만 난 좀 씁쓸했다. 내가 생각하고 결정해서 내가 받은 퇴직금으로 여행가는 것인데 왜 남편이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지? 내가 인도로 여행가는 덕분에 우리 남편은 ‘정말 대단한 남편’이 됐다.

친정과 시집에는 비밀로 하고 간 인도. 처음에는 후회했다. 남편 혼자 놔두고, 집안 식구들 모르게 하면서까지 왔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저분하고, 먼지 많고 가는 곳마다 거지가 따라다니고…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인도는 땅덩이가 넓은 만큼 아주 많은 다양성을 가진 나라이다. 가장 많이 쓰는 언어는 힌두어지만 지역마다 언어도 다르고 특색도 다 다르다. 내가 여행한 곳은 주로 인도 중부 지역으로 인도의 유명한 유적지, 관광지가 많은 곳이다. 엘로라, 아잔타, 보드가야, 아그라, 바라나시, 델리, 타르 사막… 어느 곳 하나 그냥 지나칠 곳이 없다. 그 곳에서 있었던 일들, 만났던 사람들, 느낌들이 다 살아난다.

인도하면 요가, 명상의 나라, 소들의 천국, 종교 국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인도에는 정말 소가 많다. 기차역에도 아무 거리낌없이 들어온다. 바라나시는 소똥 때문에 걷기가 힘들 정도다. 곳곳에 아쉬람(명상센터)도 많다. 버스나 택시, 심지어 릭샤(세 발 달린 오토바이) 운전석에도 그들이 숭배하는 힌두신을 모셔놓고 향을 피운다.

나는 인도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들의 ‘맑은 눈’이다. 인도 사람들은 눈이 참 맑고 예쁘다. 호기심이 강렬해서 그 큰 눈으로 외국인들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본다.

그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난 인도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산치(Sanchi)의 순례자 숙소에 머물 때였다. 저녁을 먹고 사람들과 감자를 굽다가 결혼식 구경을 갔다. 인도의 결혼식은 며칠동안 이어지는 시끌벅적하고 성대한 행사이다. 신랑이 어린아이를 앞에 앉히고 말을 타고(좀 더 부유한 집이라면 코끼리를 타고) 신부집으로 간다. 사람들은 북을 치고 악기도 연주하면서 춤을 춘다. 완전히 축제 분위기이다.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데 순간 굉장히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놈이 내 엉덩이를 만진 것이다. 정말 그때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냥 스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 손바닥 전체가 닿은 느낌이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범인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데 엉켜 춤추면서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에게도 너무 화가 났다.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는 내가 한심스럽고 바보 같았다. 한국에서도 이런 경험이 없었는데 외국에서 이런 일을 당하다니. 어느 나라나 여성들이 마음 편히 살기는 힘든 세상인 것 같다.

인도 남자들은 자기나라 여성들은 보수적인데 외국 여성들은 굉장히 개방적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왜 그런 편견을 가지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성들이 여행할 때 특히 이런 일은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이 글을 읽고 인도가 아주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는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도가 다른 나라보다 특별히 더 위험한 곳은 아니다. 인도 사람들은 호기심이 많고 친절하다. 그리고 인내심도 아주 강하다. 이런 일이 꼭 인도여서 일어났겠는가. 지금 이 시각에도 전세계 곳곳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억압, 차별은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다. 여성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전세계 여성들이 힘쓰고 있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잊지 못할 추억도 많이 있었다. 또 인도 사람들의 힘겨운 삶에 가슴 아프기도 했다. 하지만 난 인도 사람들의 맑은 눈 속에서 희망을 본다. 그리고 그 동안 내가 잊고 살았던 소중한 것들을 많이 느끼게 해 준 인도가 고맙고 그립다. 지금은 또 다시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 파묻혀 살고 있지만 언제든 인도의 향기가 그리워지면 나는 또 떠나게 될 것이다. 그때는 아줌마의 여행이 밥 짓는 일처럼 일상적인 일로 여겨지게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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