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위력이 클수록

폭행과 협박은 필요치 않고

편향된 두려움의 질서에

오래 매여 있을수록

죽을 만큼 저항하기 어렵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두려움은 오랫동안 피해자와 잠재적 피해자들의 몫이었다. 강간문화는 여성화된 존재에게 실제로 강간이 많이 일어날 뿐 아니라, 계속 공포 속에서 일상을 살게 하고, 이렇게 하면 당하지 않지 않을까? 하는 오답 같은 정답, 정답 같은 오답을 제시하며 무력한 여성성에 몸을 익숙케 하는 사회의 규범이었다.

 

일상은 잔잔한 통제들로 이뤄졌다. 옷차림을 조심하고, 잰 걸음으로 전화통화를 하며 가고, 짧은 치마는 가리고, 혼자서 다니지 말고. 친구를 택시 태우고는 번호를 적고, 상대방을 화나게 하는 대신 비위를 맞추고. 튀지 않으려 노력하기. 수잔 브라운밀러는 성폭력 두려움은 성폭력 피해의 중요한 현상일 뿐 아니라 가부장제의 사회적 통제라고 말했다. 두려움은 개인의 몫이었고, 여성화된 존재에게 조용히 깔려있는 살아감의 기저였다. 어떤 사람은 적응했고, 어떤 사람은 저항을 연습하고 시도했고, 어떤 사람은 미쳐버리거나 여자로 보이길 거부했다. 어느 부류도 조롱, 역공격, 고립, 길들이기를 그 다음으로 맞이해야 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 ‘두려움’의 실체와 사건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발화가 사회적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은 알콜을 머금은 도화선이었다. 각기 다른 여성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나도 그랬다고 미투(Metoo)를 이어갔다. 물결은 파도가 되고 곳곳에서 둑이 터졌다. 두려움을 수인하는 것이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아도 될 지도 모를 첫 번째 시대, ‘두려움’을 꺼내 들어 말한 행동은 그 어느 때도 보지 못한 격렬한 반응을 만났다.

시선의 방향이 달라졌다. 누가 두려움을 만들어왔는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연일 신문지상과 뉴스에 떠올랐다. 가해를 했을 때 상대는 분명 혼자였거나, 마치 혼자 같았고, 혼자이도록 할 수 있었는데 이제 상대는 수많은 사람들이 되어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성관계와 꽃뱀에 대해 묻지 않고 성폭력에 대해 묻는 이 상황, 한 사람의 다윗이 던지는 돌이 아니라 거대한 파도가 질문하는 이 상황. 가해자와 잠정적 가해자들은 이 힘의 상태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두려움일까. 두려움이야말로 존중의 전제라는 역설은 두려움을 권력자의 전유물이 아닌 인간에 대한 상호 예의로 바꿀 수 있을까. 그동안의 억지 평화를 구성해온 두려움의 편향 상태는 균열되고 재구성될 수 있을까?

가해자는 경찰서로, 범죄는 법으로, 라는 구호가 외쳐지고 있지만, 피해자가 법의 이상향을 기대하고 있다면, 가해자는 법의 경험칙에 기댄다. 가해자들은 ‘사람들’ 속에서 피해자를 다시 찾아 상대방과의 일대일 상황에서 어떠했는지 말하고 있다. 그 호텔에 가지 않았다, 삽입은 하지 않았다, 그런 말 하지 않았다, 때리지 않았다…. 이제야 말할 수 밖에 없고 함께 말했기 때문에 꺼낼 수 있었던 두려움의 경험은 일대일의 ‘팩트체크’ 에서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위력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을까. 두려움의 거울을 들어 가해자에게 반사한 빛의 양이 클수록, 두려움의 재구성이라는 무대에서 가해자에게 주어진 역전이 클 수록, 피해자는 ‘증명’이라는 안전감을 요구받고 있다. 고발자들의 두려움은 해소될 수 있는가? 증언자들이 고발한 두려움과 위력은 어디에 귀속될 것인가?

법이 규정하고 있는 성폭력 피해의 ‘정당성’은 폭행과 협박, 그리고 피해자가 죽을만큼 저항했는지 여부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권력이 클수록, 위력을 많이 가졌을수록 폭행과 협박은 필요치 않고, 성편향된 두려움의 질서에 오래 매여있을 수록 죽을만큼 저항하기 어렵다. 미투가 힘의 재구성을 불러오는 변화가 되려면, 힘의 편향은 먼저 밝혀져야 한다. 피해자에게 두려움에 대한 책임이나 거부를 요구하기 전에, 권력과 위력에게 질문하자. 너의 정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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