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작가 ⓒ김혜진 작가 제공
김혜진 작가 ⓒ김혜진 작가 제공

아서 프랭크의 저서 『몸의 증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책임”이며, “이야기하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만큼이나 타자를 위한 것이다.” 이 말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어떤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말하려는 사람은 다른 누군가의 “삶(그것이 삶의 아주 사소한 부분일지라도)의 안내자”가 되기를 청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것은 그런 안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이야기는 두 사람 모두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사실 이 책은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그래서 고통과 아픔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한번쯤은 겪었고, 겪게 될 이야기이므로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이야기이고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암에 걸려 투병하던 시기, 자신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이 앞으로 어떤 치료를 받아야 하고,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한 통계학적이고 사무적인 설명이 아니라, 당혹스럽고 두려운 감정을 나누고 기꺼이 공감해주는 다른 누군가의 존재였다고 고백한다. 더 구체적으로 “나를 아프게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가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나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사회는 개인의 고통과 통증에서 오는 섬세하고 내밀한 감정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질병 그 자체의 이름을 붙여, 한 사람을 환자라는 카테고리 속으로 집어넣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편이 쉽고 간편하며 간단하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어렵게 터져나온 여성들의 목소리는 그런 면에서 눈여겨볼 일이다.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나도 피해자’라고 고백할 때, 우리 사회가 그 여성들을 너무나 쉽게 성폭력 혹은 성추행 피해자의 카테고리 안에 넣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성 개인들이 서 있는 자리는 모두 다르고, 그들이 겪은 구체적인 차별과 폭력의 양상이 동일할 수는 없다. 너희가 겪은 일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겪었고, 사회 곳곳에서 너무나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며, 그러므로 우리도 잘 알고 있고, 모르지 않는다는 식으로, 그 여성들을 성폭력 혹은 성추행 피해자로 범주화할 때 여성 개인들이 가진 차이와 다름은 지워지고 생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 앞에서, 충분히 이해한다, 이미 잘 알고 있다, 라고 단언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말할 기회를 뺏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고, 유일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에서 체험하는 공포와 좌절, 고통과 슬픔은 비스듬히 맞닿아 있고, 불투명하게 겹쳐져 있지만, 결코 같을 수는 없다. 누군가가 겪는 아픔을 짐작할 수 있을지언정 거기에 완벽하게 가닿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경우든 다른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고 인정해야만 하지 않을까. 

이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모른 체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확신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최소한 지금 내 앞에서 누군가가 말하려는 고통이 수없이 반복되어 왔고, 이미 다 알고 있고, 그래서 더 들을 필요가 없다는 식의 섣부른 단정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모두 말하는 사람인 동시에 듣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말하기와 듣기 모두 큰 용기가 필요하기 마련이지만, 누군가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마칠 때까지 경청하겠다는, 그것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와 각오를 가지는 쪽이 언제나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김혜진 소설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치킨런」이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어비』, 장편소설 『중앙역』,『딸에 대하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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