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내 미소지니는

음지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남성중심적 폭력 합리화해 

성범죄의 증언 가로막아왔다 

 

 

『펀 홈(Fun Home)』(앨리슨 벡델, 출판사 움직씨)의 일부 발췌 ⓒ출판사 움직씨
『펀 홈(Fun Home)』(앨리슨 벡델, 출판사 움직씨)의 일부 발췌 ⓒ출판사 움직씨

 

오래 입을 다물어 온 것에 대해 쓰고자 한다. 숱한 ‘갑’들이 검열 없이 휘둘러 온 미세 권력에 고발로 대항하는 ‘미투(#MeToo·나도 말한다)’의 시대에 응답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법조계와 문화계로부터 불붙은 미투 운동이 정치계, 교육계, 종교계, 연예계로 잇달아 확산되며 우리 사회 전반에 도사린 강간 문화를 증언했다. 놀라울 것도 없는, 하지만 그간 쉬쉬하며 덮어온 추악한 범죄 사건들 사이에는 퀴어 간 성폭력 관련 증언들도 있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상 미투 증언은 퀴어 영화감독, 성소수자 인권단체 활동가, 대학 교수, 학교 교사 등 다양한 분야에 속한 가해자를 지목했다.

퀴어 성소수자 내의 암수범죄(Hidden crime, 실제로 발생하고 있으나 수사 기관에 인지되지 않거나 사건 해결과 범죄통계 집계가 어려운 범죄)가 미투 증언자들에 의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누구도 나서서 해결해 주지 않아 스스로 나선 사람들. 여러 미투 증언자들은 사회적 불이익과 배제, 낙인 등의 2차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침묵에서 벗어나 자신의 프라이드를 회복하기 위해 용기를 냈고, 권력자의 또 다른 가해를 막기 위해 증언을 이어가고 있다. 미투 움직임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무적이고 희망적이다.

그런데 퀴어 내 성폭력이나 데이트폭력의 경우,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유독 미투 증언을 ‘아웃팅’(Outing,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본인의 동의 없이 밝히는 행위)이라는 인권 침해 사안으로 시야를 돌려 사건 해결을 복잡하게 만드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가해자 변호인과 주변인들은 ‘가짜 미투 견제’, ‘아웃팅 협박’ 등의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 미투 증언자의 진술을 무력화하고자 애쓴다.

미투를 둘러싼 퀴어 내 담론 사이에는 성별에 따른 온도차도 크다. ‘미투는 지지하지만 불명예스런 아웃팅 사안은 도울 방법을 찾겠다’는 한 남성 퀴어 인권활동가의 글에서 모순을 엿볼 수 있다. 아무것도 밝혀진 바 없음에도 가해자로 지목된 자의 억울함에 감정 이입을 하기도 한다.

퀴어 내 성별 온도차 또한 구조적인 문제다. 일부 남성 퀴어들은 다분히 ‘마초’ 남성으로 자라 여성을 ‘뽈록이’라 비하하는 등 반쪽짜리 젠더 감수성을 부끄러움 없이 전시하고 자기 내면의 미소지니(Misogyny, 여성 혐오나 멸시 또는 반여성적 편견)를 검열하지 않고 방치한다. 이는 강제적 이성애 체계를 고발하는 퀴어 존재성의 수치다.

그간 퀴어 내 미소지니는 이성애 중심의 현행 법 제도가 작동하지 않는 음지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남성중심적인 폭력과 위계 폭력, 소수자 간 강간 문화를 합리화하고 방치해 성범죄의 증언과 해결을 가로막아왔다. 다양한 퀴어 성소수자 인권 현안에서 미소지니는 우선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미소지니는 계속되는 성범죄와 젠더 폭력을 양산한 사회배경 중 하나이고, 이는 미투 증언자와 숨어있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를 포함한 퀴어 개개인의 건강권·안전권·생명권과 직결된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얀 손가락은 서서히 커튼 사이로 몰래 숨어들며 떨리는 것처럼 보인다. 검고 기괴한 형태의 말 없는 그림자는 방구석에 기어들어 그곳에 웅크린다.” 역사상 퀴어로 알려진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쓴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한 대목이다. 1891년에 출판돼 고전으로 남은 이 소설은 연약한 나르시스트 남성의 심리를 고고하고 매혹적인 필치로 그려내 당대 데카당스(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시작돼 유럽 전역으로 전파된 퇴폐적인 경향 또는 예술운동)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았다. 나 역시 퀴어로 정체화하는 과정에서 오스카 와일드 풍의 반어와 유머에 매혹당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지난해 『펀 홈(Fun Home)』을 편집하며 오래 고집해온 취향을 검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퍼런스 중 하나인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은 미소지니를 삭제하고는 읽을 수 없었다. 우리는 너무 오래 기괴한 그림자를 방치해왔다.

앨리슨 벡델은 자전적 그래픽노블 『펀 홈』에서 미성년자에게 맥주를 사준 이유로 처벌받는 아버지를 두고 이렇게 토로한다. “부정의, 성적 수치심과 두려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의 역사. 하지만 그리 생각하면 다른 문제들에 부닥친다”고. 아버지 시대로 대변되는 비극의 역사에서 우리는 비행하듯 비켜 벗어나고 있다. 지난 퀴어 문화와 역사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반성·재고할 수 있는 지성과 감각을 갖춘 인류로서 우리는 치명적 수치를 함께 넘어설 수 있다. 틀림없이 페미니즘만이 그 공통의 해답일 것이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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