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은 했지만 현실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암울하다는 데에 비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어느 대학에서인가는 학과 교수진 전원이 성추문에 휩싸여, 개강은 했지만 정상적인 수업진행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꼴인가. 그러나 탄식만 늘어놓고 있을 수는 없다. 헤겔의 언명처럼 라벤더 향수만으로 썩은 환부를 치료할 수는 없는 법, 온 사회를 달구고 있는 #미투 운동에 마음을 모아 지지와 연대의 의사를 전한다. 이번 #미투 운동이 성폭력 근절을 위한 법·제도 개선에 단단한 초석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헌법상의 양성평등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등을 정하는 양성평등기본법은 국가기관 등이 양성평등 실현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법에 따르면 국가기관 등이 성희롱 사건을 은폐했거나 사건 고충처리 또는 구제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추가피해가 발생한 때에 여성가족부 장관은 그 관련자 징계 등을 그 소속 기관장에게 요청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잘 만들어져 있는 법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뿐이다. 말 그대로 ‘얼핏 보아야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징계 등을 반드시 요청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기관장이 요청에 따르지 않을 경우 그 기관장에게 불이익조치나 제재를 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지도 않다. 은폐나 추가피해의 직접 관련자가 소속 하급자가 아니라 다름 아닌 기관장 본인일 때는 어떤 절차에 따라서 무슨 조치가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법은 말해주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거의 지적되고 있지 않은 듯하나, 더 중요한 사실이 여기에 있다. 징계는 형사처벌과는 다르다. 쉽게 말하면, 잡혀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양성평등기본법은 국가기관 등의 장이 성희롱 은폐를 시도했거나 추가피해를 유발한 경우에 그 기관장을 형사처벌할 수 있다는 규정은 두고 있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남녀고용평등법은 직장 내 성희롱 피해를 입은 근로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하면 그 사업주를 3년 이하의 징역 등에 처한다. 사업주가 직접 성희롱을 한 경우에는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성희롱 가해자에게 징계 등 조치를 하지 않았거나 고객으로부터의 성희롱 피해를 주장하는 근로자에게 오히려 해고나 불이익 조치를 한 사업주에게는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남녀고용평등법의 형벌규정은 그 행위주체를 ‘사업주’라고만 정하고 있을 뿐, 국가기관 등의 장을 그 행위주체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사업주’가 법에 명시된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한하여 형사처벌할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남녀고용평등법은 기본적으로는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에 대해서 적용되는 법이기도 하다. 더구나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르면 국가와 지자체는 사업주를 지원해야 하는 주체다. 사업주와는 뭔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 사업주를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이 모든 걸 종합해 보면 국가·지자체는 사업주와는 전혀 다른 범주인 것처럼 보인다.

한데, 양성평등기본법 시행령에서는 사업 또는 사업장 중 ‘국가기관 등이 아닌 사업 또는 사업장’ 사업주는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성희롱 방지조치를 해야 한다고도 정한다. 이 말을 뒤집어 본다면 국가기관 등에 해당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뜻일까? 비록 양성평등기본법에는 형벌조항이 없지만 사업 또는 사업장으로서의 법적 성격도 갖는 국가기관 등에 대해서는 남녀고용평등법이 적용될 수 있어서, 그 법에서 정하는 형벌조항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뜻일까? 말인즉, 이런 곳에서는 기관장도 잡아 가둘 수 있다는 걸까? 이야기가 점점 더 혼란스러워져만 간다.

대법원은 국가기관의 장이 그 이름으로 사법상 근로계약을 체결했더라도 사업주 지위에 있는 것은 그 기관 또는 기관장이 아니라 국가라고 판시했다. 국가기관이나 지자체의 장이 사업주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상황을 가정해 보자. 근로계약에 따른 근로자를 두고 있어서 사업 또는 사업장으로서의 성격도 갖는 지자체가 있다. 여기서 근로자가 성희롱 피해를 입었는데 그 피해자에게 불리한 조치가 있었다. 이 경우에 남녀고용평등법 벌칙조항을 적용하여 지자체 대표자까지도 처벌할 수 있을까?

바로 앞에서 안 된다고 한 것 아니냐고? 왜 똑같은 걸 다시 묻느냐고? 이를 다시 묻는 이유는, 남녀고용평등법에 법인 대표자 등의 개인이 직접 행위자인 경우에 관한 처벌규정은 일단 별도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지자체도 사업주로서의 성격을 가질 수 있고, 지자체도 법인에 해당한다. 그런데 법인의 대표자나 그 대리인, 사용인 등의 자연인 개개인이 직접적 위반행위자일 때는 그 행위자 개인도 처벌할 수 있다고 남녀고용평등법이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처벌 사례를 찾기도 어려워서 실제로도 이와 같은 논리에 따른 법 적용이 가능하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

사실 더 중요한 점 한 가지. 사업 또는 사업장으로서의 법적 성격을 가지지 아니하는 지자체나 국가기관 등에 대해서는 남녀고용평등법 처벌조항의 적용 여부 및 그 가능성에 대해서 따질 이유조차 처음부터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업 또는 사업장이 아닌 곳에 대해서는 남녀고용평등법의 관련 형벌조항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규율하여야 함은 상식이다. 한데, 사업주와 국가기관 등의 장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을까? 뭐가 다르다는 것일까? 사실상 똑같은 잘못을 범하였음에도 사업주는 형사처벌 받을 수 있지만 국가기관 등의 장은 형사처벌 대상도 아니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까? 처벌 필요성이 정말 없는 걸까? 없다면 그 이유는 도대체 뭘까?

국가·지자체는 성희롱·성폭력을 예방하고 피해자를 보호해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시책을 마련해야 한다. 국가·지자체는 양성평등한 근로환경 조성을 위한 사업주의 노력을 지원해야 한다. 너무나도 마땅하다. 그러나 묻노니, 국가와 지자체는 성희롱·성폭력 피해나 그 피해의 확대와는 전연 무관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어렵사리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빈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여기저기서 크나큰 허점을 내보이고 있는 법률들만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부디 이번만큼은 이 귀한 기회를 놓치지 말자. #미투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 걸음 한 걸음씩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자. 그리고 #미투를 넘어 그 이후를 멀리 바라보자. 처벌 필요성이 있음에도 근거규정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여지가 앞으로는 없도록 모든 내용을 꼼꼼히 따져보고, 폭넓게 또한 깊이 있게 논의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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