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 헤쳐 나갈 20대 딸과

더 풍부한 삶 꿈꾸는 50대 엄마의

공통 관심사는 거리와 시장

자본주의 박물관 같은 ‘쇼디치’

재래시장에선 런던 젊은이들의

도전과 삶 엿볼 수 있어

 

런던 쇼디치의 벽화. 저항과 분노를 표하는 그라피티가 아니라, 상업적이고 아름다운 그림이 많았다. ⓒ박선이 교수
런던 쇼디치의 벽화. 저항과 분노를 표하는 그라피티가 아니라, 상업적이고 아름다운 그림이 많았다. ⓒ박선이 교수

“선생님, 누군가 런던이 지루하시다면 그분은 삶이 지루한 것입니다. 삶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런던에 있습니다.” 사뮤엘 존슨, 『사뮤엘 존슨 박사의 삶』 제3권 중.

런던은 딸과 나에게는 남다른 애틋함이 서린 도시다. 꼭 20년 전, 1년간의 연수 기회를 얻어 여섯 살 된 딸과 둘이 런던에 살았다. 아침 일찍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도 학교에 갔다. 아이는 방과 후 친구 집에 맡겼다. 모녀가 씩씩하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지만, 남몰래 흘린 눈물도 반 컵 분량은 된다. 논문 막바지에는 밤 10시에 딸을 데려왔다. 졸음에 지친 딸은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차도 없던 터라, 책 배낭은 앞에 메고 등에는 장독만한 아이를 업고 걸었다. 어쩐지 제풀에 서러워서 엉엉 울어버린 적도 있다. 캄캄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지나가던 차가 유턴을 해서 내 앞에 서더니 “한국분이세요?”하고 집에 태워다 준 일도 있다. 어떻게 아셨느냐고 했더니, 다 큰 아이를 업어주는 엄마는 한국 엄마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일하는 엄마를 키우는 데는 온 우주의 기운이 필요하다. 그렇게 지지고 볶았던 런던은 아이에게나 나에게나 언제나 쌉쌀한 감정이 깃든, 그리움이다. 이번 아비뇽-에든버러 페스티벌 여행을 마무리하는 시간은 런던이었다.

런던은 넓다. 다리를 만지면 굵은 기둥 같고 꼬리를 만지면 거친 채찍 같을 터이다. 딸과 함께 보고 싶었던 런던은 ‘사람 사는 도시’였다. 이제 성인으로 새로운 삶을 헤쳐나갈 20대 딸과 지금껏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고 더 풍부한 삶을 꿈꾸는 50대 엄마의 공동 관심사로 크게 2가지 주제, 거리와 시장에 집중하기로 했다. 첫째, ‘타임아웃(Time Out)’이 런던의 ‘꾀죄죄한(scruffy) 멋쟁이’라고 부른 쇼디치(Shoreditch). 둘째, 버로우마켓, 캠든마켓, 올드스피탈필즈마켓 등 ‘재래시장’.

 

런던 쇼디치의 벽화 ⓒ박선이 교수
런던 쇼디치의 벽화 ⓒ박선이 교수

쇼디치는 현재 진행형인 자본주의 박물관 같았다. 한때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이었고, 지금도 그 생명이 살아 있는 시티가 화려한 무대의 전면이라면, 그 무대의 바로 뒤쪽이 쇼디치다. 템즈강변에 쌓은 강둑(bank) 너머가 지금의 시티이고, 그 지역을 통칭하던 뱅크란 말이 바로 은행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쇼디치는 강변(shore) 배수로(ditch)란 뜻이다. 시티가 배설한 온갖 오물들이 강으로 흘러 들어가던 곳. 자본주의의 배수로다. 쇼디치 너머, 이스트엔드는 19세기 런던 희대의 연쇄살인범 잭 더 리퍼가 가난하고 거친 거리의 여자들을 처단했던 범죄 지역이었다.

그 쇼디치가 환골탈태했다. 골목마다 그라피티가 화려했고, 환경과 생태를 강조한 크고 작은 상점들, 옛 공장 건물을 리모델링한 첨단 패션의 클럽이 흥성했다. 한국인 여행자들에게는 지드래곤 뮤직비디오의 성지 순례 코스로 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20년 전 이 지역의 어둡고 가난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나에게는 묘한 기시감을 불러오는 곳이었다. 장미와 늑대, 여인의 누드를 아름답게 그린 그라피티는 더 이상 저항의 언어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순치된 공허한 언어로 보였다. 재개발 지역의 경제 가치를 올리는 장식 정도라고 하면 너무 삐딱한 시선일까? 젊은이들에게 인기라는 컨테이너 상가 때문에라도 쇼디치는 서울 성수동의 영국 형님으로 느껴졌다. 공장 창고를 값비싼 카페로 재탄생하게 만든 자본의 힘! 허름한 골목의 럭셔리 브랜드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 분노를 에너지 삼아 ‘남다른’ 소비로 자신을 구별 짓는 소비자들을 양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쇼디치는 컨템퍼러리 자본주의의 현주소였다. 딸과 나도 그곳에서 턱없이 비싼 파스타와 샌드위치로 배를 채우고, 색다른 그라피티를 배경막 정도로 기념사진을 남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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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시장들은 활기가 넘쳤다. 보통 런던 사람들은, 우리가 그렇듯, 재래시장을 보다 웨이트로즈, 테스코 같은 전국 규모의 대형마트를 선호한다. 하지만 주말 시장이나 아침 시장으로 운영되는 재래시장의 인기도 여전하다. 여행자들과 현지인이 모두 즐겨 찾는 런던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으로 버로우마켓, 캠든마켓, 올드스피탈필즈마켓, 빌링스게이트 생선시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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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브릿지 남쪽의 버로우마켓은 1014년 문을 열었으니, 1000년을 넘긴 시장이다. 19세기에는 영국 전역을 담당하는 청과물 도매시장으로 자리 잡았으며, 1990년대 이후 대형 마켓에 밀려 시장으로서의 기능은 확 줄었지만 지금도 직접 재배하고 기른 신선한 채소와 과일, 고기, 해산물을 들고 나오는 상인들로 시끌벅적하다. 평일은 오전 10시, 주말은 오전 8시에 문 열고 오후 5시에 문 닫는다. 엘시 앤 벤트(Elsey & Bent) 등 11개의 청과상을 비롯해 생선, 육류, 치즈, 제과 제빵 등 다양한 부문에서 300여 개의 가게와 매대가 펼쳐진다. 오전에 가서 구경한 뒤 이른 점심을 하기 좋다. 매대에서 파는 샌드위치, 커리, 피시앤칩스가 맛있다. 엘시 앤 벤트의 짐꾼 겸 기록원으로 일하던 마이클 홉스가 25년 전 시작한 ‘홉스 미트로스트(Hobbs Meat Roast)’는 바게트 안에 돼지안심구이, 칠면조 가슴살을 담아주는 따뜻한 샌드위치로 인기다.

올드스피털필즈 마켓은 시티에서 쇼디치로 가는 동선에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창고 건물 자체가 빈티지 풍. 목요일에는 골동품과 빈티지 의류 시장이 열리고 금요일에는 패션과 미술품을 판다. 우리가 간 날은 마침 세 번째 금요일. 레코드 페어가 열리고 있었다. 60~70년대 팝 음반은 물론, 오래된 희귀 음반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비닐 레코드를 처음 보는 딸은 너무도 신기해했다. 빌링스게이트 피시 마켓은 서울로 치면 노량진수산시장 같은 곳. 위치도 시내에서 템스강 하류로 내려와 아일오브독 부근에 있다. 영국에서 가장 큰 생선시장으로, 1층에 매대 98개, 가게 30개가 들어서 있다. ‘피시 앤 칩스’의 나라답게, 한쪽에서는 감자도 판다. 시장 안 2개의 카페에서 따뜻한 차와 음식을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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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든마켓은 이번 런던 여행에서 딸이 가장 좋아했던 곳이다. 20년 전 런던에 13개월 살면서 한 번도 안 갔던 이곳은 시장이라기보다 관광지에 더 가깝다. 홍대 앞과 남대문시장과 광장시장 먹자골목을 합친 것 같은 분위기로, 캠든마켓 안쪽은 보헤미안 풍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장신구, 기념품, 생활소품이 많다. 나와 딸은 과일과 곡식을 소재로 만든 귀걸이, 목걸이를 샀다. 우리나라에서도 재래시장 곳곳에 젊은이들이 들어가 시장 살리기에 나서고 있는데, 캠든마켓이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감각적인 수공예품, 신선식품으로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사회에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버로우마켓, 올드스피탈즈마켓, 캠든마켓, 빌링스게이트마켓은 지루하지 않았다. 런던 시장에서 런던 젊은이들의 도전과 삶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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