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은 르노삼성자동차 성희롱 피해자 박모 씨가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은 르노삼성자동차 성희롱 피해자 박모 씨가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국여성단체연합, 4일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34회 한국여성대회

’직장 성희롱 인식 확산·2차피해 방지제도 기틀 만든

르노삼성 성희롱 피해자 박모 씨부터

페미니스트 교사 최현희 씨까지

‘미투’ 마중물 된 여성들 시상대에

지금 한국을 뒤흔드는 ‘미투(#MeToo)’ 운동 이전에 성차별과 성폭력을 고발해온 여성들이 있다. 사내 성희롱 피해를 용감하게 고발하고, 수년간 싸워 ‘기업이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에게 징계 등 불이익을 주면 불법’이라는 대법원 판결을 최초로 받아낸 르노삼성자동차 성희롱 피해자, 2016년 성폭력 말하기 운동에 동참해 문단 내 성폭력을 사회적 의제로 만든 ‘고발자5’와 연대모임 ‘탈선’,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을 사회적 의제로 만든 초등교사 최현희 씨.... 말하고 싸워온 여성들과, 이들을 돕고 연대해온 여성들이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다시 조명됐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4일 ‘2018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34회 한국여성대회’를 열고 ‘미투’의 마중물이 된 여성들을 시상했다. 이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대회엔 흐리고 쌀쌀한 날씨에도 2000여 명(주최측 추산)이 참석해 성폭력 말하기에 나선 여성들에게 힘찬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성평등 사회를 향해 함께 나아가자고 외쳤다. 

‘올해의 여성운동상’에 르노삼성자동차 성희롱 피해자 박모 씨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은 르노삼성자동차 성희롱 피해자 박모 씨는 이날 수상 소감 요청에 “회사에 건재한 2차 가해자들의 보복이 두렵긴 하나 하고픈 얘기가 너무 많다”고 입을 열었다. 박 씨는 2013년 사내에 피해를 신고한 후 오히려 업무 배제 등 징계와 2차 가해를 겪었다. “성범죄를 신고하고 나니 모두들 내가 전염병 환자인 것처럼 피했다”고 회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4년6개월간의 법정 투쟁은 기념비적 승리로 끝났다. 지난해 12월22일 대법원은 박 씨의 손을 들어줬다. 기업이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에게 한 조치가, 남녀고용평등법 제14조제2항이 금지하는 불리한 조치로서 위법한지 여부의 판단기준을 대법원에서 최초로 제시했다. 사측이 피해 조력자에게 보복적 징계처분을 하면 불법행위라는 판단, 직장 내 성희롱을 조사했던 인사팀 직원의 의무 위반에 대한 사용자 책임도 이끌어냈다. 이제까지 협소하게 해석되어온 남녀고용평등법 14조 2항을 현실에 맞게 확장해 해석할 기준을 제시한 판결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이 판결을 계기로 지난해 11월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사업주 의무 강화 ▲피해자 등 보호조치를 의무화 등을 담은 남녀고용평등및일가정양립지원에관한법률이 개정되기도 했다. 여연은 “피해자의 끈기 있고 용기 있는 대응이 성평등한 노동환경과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조력자 2차 피해 방지를 위한 제도 구축의 출발점을 마련했고, 대법원 판결을 전체 여성들의 승리로 확장해 성폭력 말하기에 나서는 여성들에게 든든한 힘이 됐다”고 시상 이유를 밝혔다. 

박 씨는 “지난 5년간 제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던 국가기관은 하나도 없었다. 검찰, 고용노동부는 신고에도 방관했을 뿐 2차 피해를 멈출 수 없었다. 쉽진 않았지만 이 (대법원) 판례만 있으면 우리 같은 사람들도 국가기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악물고 버텼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그는 이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수년간 함께 사건 해결에 힘써온 여성단체들에도 감사를 표했다.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 34회 한국여성대회 기념식에서 성평등 디딤돌 수상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 34회 한국여성대회 기념식에서 '성평등 디딤돌' 수상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페미니스트 교사·문단 내 성폭력 공론화한 여성들...2017 ‘성평등 디딤돌’ 수상자 5팀

2017년 한 해 동안 성평등 실현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하는 ‘성평등 디딤돌’은 ▲성별임금격차의 심각성을 공론화한 ‘3·8 조기퇴근 시위 3시 STOP 공동기획단’ ▲페미니스트 선생님 ‘마중물샘’ 최현희 교사 ▲문단 내 성폭력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낸 ‘고발자5’와 연대모임 ‘탈선’ ▲국가가 관리한 성매매에 대해 국가 책임을 이끌어낸 ‘한국 내 기지촌 미군위안부 국가배상청구소송 공동변호인단’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해 사회 변화를 촉구한 「아내폭력에서 탈출한 여성들의 이야기 :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공동저자 6명이 받았다. 

“가장 힘든 것은 공격 탓에 제가 위축되고 목소리를 낮춰야 했던 순간들을 견디는 것이었다. (...) 저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아 혼자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제가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동시대의 많은 여성들 덕분이라는 것을 기억하겠다. 앞으로도 연대하고 고민하며 함께 페미니즘 교육을 실천하겠다. 여러분도 외롭게 싸우는 페미니스트 교사들을 위해 구체적 의제를 만들고 연대해 주시길 바란다.”(최현희 교사)

“저희는 언론 노출 없이 익명으로만 법정 투쟁해 왔지만,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연대해주신 결과 (1심에서) 승소했다. 지금도 여러 익명의 (성폭력) 고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모두 저희처럼 얼굴을 가진 한 명의 여성이다. (...) ‘미투’ 운동이 계속되면서 ‘오늘도 또 기사 나왔네’라는 반응이 나오지만, 우리가 항상 겪고 있었던 일 아닌가.” (고발자5)

“약 6년간 소송했다. 최근 고등법원의 선고를 듣는 순간 많은 아픔이 법정에서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교수, 단체 활동가, 연구자 등이 저희와 함께 끈질기게 싸워주신 덕이다. 법정에서 힘든 증언을 하고, 때론 당당하게 준엄하게 국가의 잘못을 묻고 책임지라고 말해준 기지촌 위안부 피해자들이 받아야 하는 상이 아닌가 싶다. (...) 아직 재판은 끝나지 않았다. 국가는 상고를 취하하라. 여기 오신 국회의원들께 말씀드린다. 소송에서 끝내면 안 된다.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2심의 700만원 배상 판결은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와 정치권은) 피해자들의 전 생애를 유린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사과하고, 제도를 만들어 배상하라.” (김수정 변호사, 기지촌 위안부 사건 변호인단 대표로)

“오늘 여러 축사가 나왔지만, 정말로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라고 생각한다.” (‘3·8 조기퇴근 시위 3시 STOP 공동기획단’ 소속 ‘이랑’)

“나아갈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지만, 우리가 힘을 모으면 찬란한 봄은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아내폭력에서 탈출한 여성들의 이야기 :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공동저자들)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 34회 한국여성대회 기념식에서 ‘성평등 걸림돌’이 발표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 34회 한국여성대회 기념식에서 ‘성평등 걸림돌’이 발표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편, 지난해의 ‘성평등 걸림돌’로는 △전(前) 사장의 지시로 면접 점수를 의도적으로 조작해 여성 지원자를 탈락시킨 사실이 드러나 관련자들이 기소된 ‘한국가스안전공사’ △사건 은폐 시도·가해자 편들기 등 최악의 직장 내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을 보여준 ‘한샘’ △여성혐오 컨텐츠를 조장·방조해 비판받아왔으나 여태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 ‘아프리카 TV’ △가해자 입장에서 성폭력 사건을 다룬 결과 피해자가 ‘충분히 피해자답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주여성 친족성폭력사건 담당 제주지방법원 1심 재판부’ △간호사들에게 노출 의상을 입고 선정적 춤을 추도록 강요하는 등 성적 대상화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대구 가톨릭병원과 한림대 성심병원 △간부급 남성들이 비정규직 직원을 성추행한 사건에 미온적으로 대처해 2차 가해를 저지른 대구은행이 뽑혔다.

올해 여성대회는 성차별·성폭력 말하기인 ‘3·8 샤우팅 - 말하고, 소리치고, 바꾸자’를 시작으로 문을 열었다. 참가자들의 거리 행진인 ‘3·8 행진’, 부스 행사인 ‘3·8 난장’과 기념식이 진행됐다. 기념식은 축사, 시상식, 3·8여성선언, 축하공연, 마무리 댄스 퍼포먼스 순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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