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능력을 발휘하기는커녕 황당한 현실 인식을 보여주는 것은 정치권만이 아니다. 온라인에선 힘겹게 입을 연 피해자가 누구인지, 왜 수년이 지난 시점에 폭로하는지, 순수한 피해자로 볼 수 있는지 등에 대한 루머가 난무하고 있다. 언론은 추측성 보도와 피해자 신상 파헤치기, 피해자 인터뷰 확보 경쟁에 나서 페미니스트들의 힐난을 받고 있다. 용감한 고발의 대가로 피해자의 신상은 낱낱이 털리고, 포털 인기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기도 한다.

 

지금 온라인에선 미투 운동에 나선 피해 고발자들에 대한 공감과 지지만큼이나, 폭로의 저의가 의심스럽다며 무고로 몰아가거나 힐난하는 댓글도 난무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다음뉴스 화면 캡처
지금 온라인에선 미투 운동에 나선 피해 고발자들에 대한 공감과 지지만큼이나, 폭로의 저의가 의심스럽다며 무고로 몰아가거나 힐난하는 댓글도 난무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다음뉴스 화면 캡처

 

언론은 추측성 보도와 피해자 신상 파헤치기, 피해자 인터뷰 확보 경쟁에 나서 페미니스트들의 힐난을 받고 있다. ⓒ온라인뉴스 헤드라인 캡처
언론은 추측성 보도와 피해자 신상 파헤치기, 피해자 인터뷰 확보 경쟁에 나서 페미니스트들의 힐난을 받고 있다. ⓒ온라인뉴스 헤드라인 캡처

“언론은 이미 선을 넘었다. 피해자들을 계속 찾아내면서 그들의 신분이 노출될 위험에 대해선 전혀 배려 없는 인터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언론이) 피해자들의 (폭로) 이후의 삶에 대한 아무런 책임도 안 지지 않느냐. 그것이 언론보도준칙에 맞는지 따져볼 일이다.” (이선경 법무법인 유림 변호사, 2월 27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주최 포럼)

“기자들이 ‘왜 한국의 미투 운동은 익명이냐? 이름도 얼굴도 까야지, 익명으로 고발해서 뭘 얻으려 하냐?’고 묻는데, ‘피해자들이 왜 익명으로밖에 말할 수밖에 없는가’로 바꿔 물어야 한다.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을 역고소해 입을 막아오지 않았나? 우리 사회가 피해자 인권을 보호하고 가해자 처벌하기 위해서 제대로 노력해왔나? 그렇지 않으면서 피해자들에게 순수함을 요구할 수 없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2월 26일 여연 주최 토론회)

 

한국여성단체연합 7개 지부 28개 회원단체가 주최하는 #Me Too 운동 긴급 토론회 “우리는 아직도 외친다. 이게 나라냐!”가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마이크임팩트 라운지에서 열렸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국여성단체연합 7개 지부 28개 회원단체가 주최하는 #Me Too 운동 긴급 토론회 “우리는 아직도 외친다. 이게 나라냐!”가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마이크임팩트 라운지에서 열렸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게다가 ‘여성가족부와 여성단체는 뭐하냐’는 뜬금없는 호통, ‘진보 여성단체들이 진보 인사들의 성추문엔 유독 조용하다’는 정치적 해석도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를 타고 번지는 중이다.

이나영 교수는 “한국 진보여성운동의 도도한 역사, 반성폭력 운동의 지난한 세월부터 먼저 살펴보시라”라고 일축했다. 여성계에 미투 운동은 낯설고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당장 2016년 10월부터 들불처럼 일어난 #○○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면 “일제 강점기,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 더 최근엔 2015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관습에 의문을 던지며 차별적 구조에 저항하고 시대를 거슬렀던 사람들”(이나영 교수)도 있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피해증언으로 비롯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와 2003년부터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시작한 ‘생존자 말하기 대회’도 있다.

“여성단체들은 지난 30년간 한국사회의 성폭력 근절을 위해 노력해왔고, 관련 법 제정에도 앞장서 왔다. 오랫동안 목숨 걸고 싸워왔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응답하지 않았다. 고 장자연 사건 당시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모두 무혐의 처분됐다. (…) 조직 보위, 진영 논리 모두 거부하고 싶다.” (김영순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26일 여연 주최 토론회에서) “우리는 그런 프레임 자체를 거부한다.”(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 2월 27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주최 포럼)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은 지난달 27일 진흥원 대교육장에서 ‘“더 많은, 더 큰 #미투”를 위하여’를 주제로 제2회 이후 포럼을 열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은 지난달 27일 진흥원 대교육장에서 ‘“더 많은, 더 큰 #미투”를 위하여’를 주제로 제2회 이후 포럼을 열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이윤택은 갑자기 나타난 괴물이 아니다.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 손한민 대통령 직속 국가일자리위원회 청년분과위원장,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김어준 씨 등이 더해져 남성이 여성들을 손쉽게 착취하고 여전히 사회의 존경을 받는 일이 가능했다.” 여성문화예술연합 신희주 영화감독은 많은 언론이 ‘한국 사회도 미투 운동을 계기로 변화할 것’이라고 전망한다며 “저는 반대로 이 사회가 변화하기 위해서 얼마나 더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페미니스트들은 개별 성폭력 사건보다 ‘성별’ 권력 관계의 문제, 구조적 성차별에 초점을 맞춰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나영 교수는 “가해자를 ‘악마화’해 개인의 도덕적 흠결 문제로 축소하는 데 반대한다. 이는 미봉책에 불과하며, 성폭력을 특수한 피해자의 문제로 축소한다”며 “피해자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현실이다. 이는 가장 오래된 적폐가 성차별적 구조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고 말했다.

법제도의 개선이 시급하다. 공소시효가 지난 성범죄는 어떻게 조사해 처벌할지, 직장 내 성희롱 고발 시 피해자와 조력자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보호할지 논의해야 한다. 송란희 사무처장은 성범죄 피해자가 무고죄로 고소·고발되면 2차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당 사건이 불기소 처분 종료되거나 재판이 확정되기 전까지 무고죄를 조사·수사·심리·재판하지 말라는 성폭력 무고죄 적용 유예 방안도 검토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기존 피해 신고·상담 센터 기능 향상 등도 절실하다. 동시에 성폭력에 대한 폭행·협박 최협의설(강간죄가 성립하려면 가해자의 폭행과 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어야만 성폭력으로 인정한다는 개념) 폐기와 현실적이고 포괄적인 성폭력 개념 규정 만들기, 가해자 엄벌,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조항 폐지, 경찰과 사법부의 젠더감수성 향상 노력, 페미니즘 교육 시행 등도 중요한 대책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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