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되짚어보자. 못된 여자가 주인공인 작품을 살면서 몇 편이나 보았나. 일시적으로 나쁜 마음이나 직업을 갖고 있지만 사실 마음씨는 곱고 정의로운 여성이 아닌, 정말 못된 여성 말이다. 

# 1 드라마 ‘굿플레이스’의 엘리너 셀스트롭

 

미국 NBC 드라마 ‘굿플레이스’의 엘리너 셀스트롭 ⓒNBC
미국 NBC 드라마 ‘굿플레이스’의 엘리너 셀스트롭 ⓒNBC

여기 엘리너 셀스트롭이라는 여성이 있다. 그의 직업은 노인들에게 가짜 약을 파는 것이다. 마시던 커피는 바닥에 던져버리고 본인이 운전해야 하는 차례에 술을 마셔버린다. 친구의 불운을 이용해 돈을 벌고 길 가다 환경보호 캠페인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조롱한다. 입버릇도 나쁘고 매사 이기적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그가 실수로 천국에 갔다. 지옥으로 끌려가 고문 받지 않으려면 착한 사람인 척을 해야 한다. 그래서 엘리너는 천국의 친구인 윤리학 교수 치디에게 수업을 받으며 새로운 인간이 되려고 하는데…. 이상 드라마 ‘굿플레이스’의 초기 설정이다. 

이 드라마에서 착한 사람의 기준은 ‘얼마나 이타적일 수 있는가’ 이다. 나는 타인을 생각할 수 있게 된 엘리너를 보며 만족감을 느꼈지만, 과거 회상으로 나오는 엘리너의 못된 행동을 보며 어딘가 시원함을 느꼈다. 마시던 커피를 바닥에 던져 버려버리는 여자 주인공? 바텐더랑 자려고 친구들을 저버리는 여자 주인공? 그를 동경한다는 게 아니다. 엘리너를 따라 마시던 컵을 바닥에 버리고 싶진 않다. 하지만 머릿속 서사의 폭이 넓어지는 경험이었다. 엘리너가 귀엽고 사랑스럽게 그려지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것도 신선했다.

악녀에 감정을 이입하기란 어렵다. 나쁜 여자는 일단 주인공의 위치에 가지 못한다. 조연의 자리에서 주인공을 받쳐주거나 이야기의 양념이 돼야 한다. 미운 존재이며 무조건 벌을 받거나, 성녀와도 같은 여자주인공을 통해 새사람이 돼야 한다. 나는 그런 공식을 충실히 따른 동화를 읽으며 자랐다. 그러한 드라마와 영화를 수없이 봤다. 

여성의 경우 나쁘지만 사랑스러운 주인공은 거의 없다. 나쁘지만 멋진, 즉 입체적인 인물은 주로 남성 몫이다. 유년기의 트라우마 때문에 잘못 자랐고 거칠어도 따뜻한 마음이 숨겨져 있어 시청자들이 점점 애정을 갖게 되는 캐릭터 말이다. 그리고 그를 갱생시키는 역할을 여자가 맡곤 한다. 여자 캐릭터의 경우엔 주로 이랬다. 서투르지만 마음씨는 고운, 명랑하고 마음씨가 고운, 무뚝뚝하지만 마음씨가 고운, 대놓고 마음씨 고운…. 못된 여성은 조연으로 나와서 벌을 받는다. 그런 여성관이 팽배한 사회에서 자란 많은 여성들은 미움받기 두려워하는 착한 여성 콤플렉스에 걸린다. 

# 2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레베카 번치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시즌 1 포스터 ⓒCW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시즌 1 포스터 ⓒCW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에서 사랑에 빠진 여성들은 미친 짓을 하다가 쓰레기통에도 빠지고 구두 굽도 부러지는 등 귀여운 망신을 당한다. 하지만 정말 미친 여자라면 어떨까? 여기 미친 전 여자친구가 있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사랑에 빠져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여성 레베카의 이야기다. 이 드라마의 시즌 3 주제가엔 ‘사람들은 침대에서 미친 여자를 좋아하지만 진짜로 미친 여자는 좋아하지 않아’라는 소절이 있다. 그것은 여자에게 부여된 아주 어려운 속성이다. 팜므파탈 같아야 하지만 실제로 남자의 인생을 파괴하면 안 되고, 날 미치게 만들어야 하지만 실제로 미친 여자이면 안 된다는 것. 이 똑똑한 드라마는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비튼다. 남자 주인공을 향한 커다란 사랑이 사실은 정신병에서 비롯된 집착이라면? 귀여움과 징그러움의 경계는? 자신의 병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까지 나아가는 이 쇼는 주인공 역을 맡은 레이첼 블룸이 직접 만들었다. 똑똑하고 웃긴데 삽입된 노래들과 뮤지컬 장면들도 끝내준다. 

# 3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의 그레이스 핸슨과 프랭키 버그스타인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의 그레이스 핸슨과 프랭키 버그스타인 ⓒNetflix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의 그레이스 핸슨과 프랭키 버그스타인 ⓒNetflix

여기 프랭키와 그레이스라는 두 할머니가 있다. 프랭키는 마리화나를 피우고 그레이스는 알콜 중독이다. 원래 서로를 안 좋아했으나 서로의 남편들이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의기투합하게 됐다. 직업은 바이브레이터 만들기다.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노인의 성 문제를 마카롱처럼 잘 다뤘다. 적나라한 색깔로, 하지만 먹기 좋게 잘 포장했다. 나이가 들면 윤활제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두 할머니 덕분에 알았다. 

프랭키는 가는 곳곳마다 민폐를 부리며 그레이스는 얄밉다. 하지만 우리는 두 할머니와 그들이 일구어나가는 인생을 사랑하게 된다. 무릎이 아파서 계단을 앉아서 거꾸로 올라가도 결코 불쌍해 보이지 않는 노인의 인생을 말이다. 그들이 사는 집 창문 너머 보이는 바다 풍경은 덤이다. 이 드라마는 프렌즈를 제작했던 여성 마사 카우프만이 만들었다. 

남성이 본 여성, 남성이 원하는 여성상을 다룬 납작한 이야기에 자신을 동화시키려 노력했던 세월이 너무도 아깝다. 이제 TV 속엔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고, 아마 더욱 늘어날 것이고 그 파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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