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스콧과 제임스 배리,

코난 도일이 나고 자란

‘작가의 도시’ 에든버러

 

작가 도시 에든버러의 여름 축제-북페스티벌 ⓒ박선이 교수
작가 도시 에든버러의 여름 축제-북페스티벌 ⓒ박선이 교수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에 너무 깊이 빠지면 정작 에든버러를 놓칠 수 있다. 훤한 대낮 내내 어두컴컴한 극장만 찾아다니는 페스티벌 관객에게 에든버러의 초록빛 언덕과 새파란 바다는 공연 포기라는 죄악으로 이끄는 유혹의 첨병이다.

북해(北海)에 면한 인구 45만명의 이 바닷가 도시는 15세기 중엽 이래 옛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이자 ‘스코틀랜드 문화’의 중심이다. 북위 55°56′58″의 북국 도시이지만 해류와 편서풍의 영향으로 한 여름 월 평균기온이 섭씨 14도 안팎, 겨울 월평균기온이 섭씨 4도. 한마디로, 냉랭한 곳이다. 푹푹 찌다가 바싹 굽는 한국의 한 여름에 숨 막혔던 모녀에겐 도시 전체가 ‘강 냉(冷)’ 파라다이스였다.

딸과 이 도시를 처음 찾았던 것은 꼭 20년 전인 1998년 여름. 아이는 일곱 살. 나는 런던서 석사 과정을 막 마쳤던 그 때, 친정 부모님과 동생들, 조카들이 와서 9인승 승합차를 빌려 영국 일주 여행 끝에 이곳까지 왔었다. 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른은 초로를 바라보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에든버러의 외양은 거의 그대로다. 새삼 인생의 유한함을 실감한다. 이십대 후반인 딸은 언제 또 이곳에서 50대 후반 엄마와의 시간을 기억할까? 웨이벌리 역 앞, 도시의 심장을 동서로 관통하는 프린세스 스트리트(Princes St.)의 최고 명물은 월터 스콧 기념상.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시커먼 첨탑 한 가운데 작가가 앉아있다. 왕, 여왕, 장군들의 동상이 줄지어 선 런던이나 다른 유럽도시와 달리, 에든버러의 중심에는 작가가 앉아있다.

 

스콧 기념비 사진 ⓒ에든버러 포토라이브러리
스콧 기념비 사진 ⓒ에든버러 포토라이브러리

그렇다! 에든버러는 작가의 도시다. 역사 소설 『웨이벌리』 등으로 명성을 얻은 작가 월터 스콧이 에든버러의 심장이자 얼굴이다. 고집 세고 강직하며 공의에 목숨을 바치는 스코틀랜드인의 이미지는 월터 스콧이 만들어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Blood is thicker than water)”는 말도 1815년 작 『가이 매너링』에 나온다. 그밖에도 『피터 팬』의 제임스 배리, 『보물섬』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셜록 홈즈』의 코난 도일, 『성채』의 A.J.크로닌, “나의 연인은 붉고 붉은 장미…”로 이름난 시인 로버트 번스 등 숱한 작가들이 이곳 출신이다.

현재의 에든버러 작가는 단연 조앤 K. 롤링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로 2017년 세계 최고 소득 작가 1위에 오른 롤링은 사실 스코틀랜드 출신이 아니다. 잉글랜드 남서부 글로스터셔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포르투갈 남성과 결혼해 딸을 하나 낳은 뒤 이혼하고 에든버러에 왔다. 생활 보조금으로 나오는 주 70 파운드(약 10만원)로 딸의 분유 값과 생활비를 댔던 롤링은 시내 카페에 가서 『해리 포터』를 썼는데, 에든버러 성이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그 카페가 바로 조지4세 다리(George IV Bridge)거리 21번지 ‘엘리펀트 하우스’ 카페다. 『해리 포터』 광팬인 딸은 에든버러에 온 첫 날부터 엘리펀트 하우스에 가고 싶어 마음이 바빴다.

 

엘리펀트 카페 앞은 이른아침부터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박선이 교수
엘리펀트 카페 앞은 이른아침부터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박선이 교수

엘리펀트 하우스는 1995년 문 열었으니 롤링이 『해리 포터』를 마무리하던 시기다. 이곳에서는 아침-점심-저녁 식사를 내놓으며 주 7일 연중무휴로 문 연다. 딸과 나는 카페가 좀 덜 붐빌 시간을 노려 아침 9시에 갔다. 그래도 두 팀을 기다린 뒤 들어갈 수 있었다. 딸은 바나나 팬케이크와 차, 나는 오트밀과 커피를 주문했다. 유명세에 비해 직원도 친절하고, 음식도 괜찮았다. 에든버러 성이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를 부러워하며 바라보았더니 기념사진 찍으라고 기꺼이 자리를 비켜준다. 관광객끼리의 우정이랄까?!!! 여자 화장실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팬들이 전 세계 각국 문자로 해리 포터(와 다른 등장인물들)에 대한 사랑을 쏟아낸 현장이었다. 빈자리 하나 찾기 어렵게 빼곡하게 낙서가 들어차있었다. 과연 여성들만 이럴까? 궁금하면 못 참지…, 잠깐 남자 화장실 문을 열고 살펴봤다. 세상에. 깨끗했다. 팬덤은 여성들의 ‘숭배 문화’란 말인가?!!

 

엘리펀트 카페 여성 화장실을 가득 메운 헤리포터 팬들의 낙서. ⓒ박선이 교수
엘리펀트 카페 여성 화장실을 가득 메운 헤리포터 팬들의 낙서. ⓒ박선이 교수

그런데 롤링은 왜 하필 엘리펀트 하우스 카페로 갔을까? 흔히 롤링이 동네 카페에서 『해리 포터』를 썼다고 하는데, 그때 살던 동네는 에든버러 북쪽 라이스(Leith)로, 엘리펀트 하우스 카페가 있는 구 도시와는 꽤 떨어져 있다. 현장에 답이 있는 법이다. 카페 바로 길 건너편에 스코틀랜드 국립도서관이 있었다! 1689년 개관해 1710년 국립도서관 자격을 얻은 이 도서관은 1400만종의 인쇄물 외에도 필사본 10만종, 지도 200만종, 영화 4만6000편을 소장하고 있다. 신문과 잡지도 2만5000종을 갖춘 이곳은 지적 호기심을 하고 창조적 글쓰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현존하는 낙원이다. 가난한 싱글맘이 하루 종일 공짜로 책 읽고 영화 보고 길 건너 카페에서 가벼운 식사로 배를 채우고 글쓰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니었을까. 롤링은 말했다. “무엇인가에 실패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너무나 조심스럽게 살아서 전혀 살지 않은 것처럼 지낸다면 실패는 않겠지만 이때에는 자연스럽게 당신의 삶은 실패한 것이다.” 롤링의 기적을 가능케 한 것은 생활보조금 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자료를 무제한 제공하는 도서관이었던 것이다!

 

작가 도시 에든버러의 여름 축제-북페스티벌 ⓒ박선이 교수
작가 도시 에든버러의 여름 축제-북페스티벌 ⓒ박선이 교수

작가 도시, 에든버러를 즐기는 길은 계속 된다. 에든버러 성에서 홀리루드 성에 이르는 길- 로열 마일 건너편 ‘작가 박물관’(Writer’s Museum)이 남아있다. 스코틀랜드 문학의 3대 거장- 시인 로버트 번스와 소설가 월터 스콧, 루이스 스티븐슨이 사용하던 책상, 시집 인쇄기, 승마부츠, 초판본 등을 소장하고 있다. 딱 3개만 제작한 로버트 번스의 해골 석고 모형 중 하나도 이곳에 전시돼있다. 무료 입장.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는 문학 애호가들에게는 ‘에든버러 문학산책(Book lover’s tour)’이 기다리고 있다. 5~9월 중에는 수~일요일 오후 1시 30분 작가박물관 앞에서 출발하고,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 중에는 오전 11시에 한 번 더 있다. 90분 동안 로버트 번스, 월터 스콧, 루이스 스티븐슨, 코난 도일, 제임스 배리, 알렉산더 매콜 스미스, J.K. 롤링 등 에든버러의 문학 발자취를 걷는다. 『에든버러 문학산책: 순례자 안내서』(Book Lovers’ Edinburgh: A Pilgrim’s Guide)를 쓴 앨런 포스터(Foster)가 안내한다. 어른 12파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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