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교육을 천지신명께 축도하였더니”

이배용/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평생교육원장

1898년 9월은 한국여성사에서 매우 뜻깊은 해이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단체인 찬양회가 출범하였던 것이다. 찬양회는 특히 여학교 설립 후원을 목적으로 개화된 부인들이 모여 발족했는데, 찬양(贊襄)이란 도와서 길러준다는 뜻 즉, 후원·양성을 의미한다. 회장에는 이양성당, 부회장에는 김양현당, 사무원에는 고정길당 등으로 구성되었다. 조직은 부인회원이 400명이고, 집회 때마다 방청인이 100여명 모일 정도로 큰 집단을 이루었다.

회장인 이양성당은 북촌 양반가의 부인으로서 연설에 능하고 근대 학문을 배운 남자보다 식견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부회장 김양현당은 온유하고 정직하며 예절바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본래 평양 출신으로 자녀도 없이 남편과 일찍 사별하여 혼자 살다가 1898년 이전에 서울 북촌 양반층 부인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학문적 소양과 선각적 개화지식을 지닌 여성이었다.

사무원 고정길당은 부친이 1860년 함경도에서 러시아로 이주하였다가 러시아인으로 귀화한 집안에서 성장한 사람이다. <독립신문>에서는 그를 “러시아어와 청국어에 능통한 가히 여중호걸이라”고 평하였다. 주로 찬양회의 조직을 주도하였다.

이와 같이 찬양회는 주로 서울 북촌 출신의 개화된 지식층 여성들을 중심으로 서북지방 내지는 외국생활을 경험한 여성, 새롭게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를 졸업한 여성, 그 외에 기생, 서민층 여성등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로 구성되었다.

‘남학여맹’ 편견깨고 여성의 교육권 강조

이렇게 많은 여성들로 단체를 구성할 수 있었던 배경은 첫째 1886년 이 땅에서 최초로 선교사가 근대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운 것을 비롯하여 그 후에도 선교사들에 의해 여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여 정식교육을 받고 새롭게 근대적 의식으로 성장한 여성들이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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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권통문(여학교 설시통문)’이 실린 <독립신문> 기사.(1898년 9월 9일자)

둘째 독립신문을 비롯한 언론에서 여성들이 깨어날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향상을 위한 여성 자신의 의식 개발을 고취하고 있었다. 셋째 전통적인 기반을 가진 양반계층에서도 근대화와 구국의 일념에서 여학교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계몽적 분위기가 고조되었다는 점이다.

1898년 9월 8일자 <황성신문>과 같은 해 9월 9일자 <독립신문>에 게재된 <여권통문>은 우리 나라 여성에 의한 최초의 여권선언이었고, 동시에 여성의 교육권 획득을 위한 여권운동의 시발이었다. 찬양회 부인들이 준비단계를 거쳐 첫 번째 공식 집회를 가진 것은 1898년 9월 25일 승동의 홍소사(召史)의 집에서였다. 150여명의 회원 및 방청인이 모인 가운데 이미 작성 발표된 여권통문이 정식으로 낭독되었다.

이 통문은 단순한 학교 설립만이 목적이 아니라 서구 사회에서 성취된 것과 같은 서양의 천부인권 사상을 배경으로 남녀 평등권의 획득을 구상하고 있다. 즉 첫째는 문명, 개화 정치를 수행하는 민족 대열에 여자도 참여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남자와 평등하게 직업을 가지고 일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며, 셋째는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교육을 받음으로써 독립된 인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여권 선언의 특색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남학여맹(男學女盲)의 전통적 인식을 뚫고 여성의 교육권 획득을 가장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하여 여권통문을 일명 ‘여학교 설시 통문’이라고도 하였다. 그 교육은 여성규범의 교육이 아니라 근대적 학문을 가르침으로써 독립된 인격을 갖춘 근대 여성으로 키우는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다.

“국가가 당연히 관립여학교 설립해야 한다”

이와 같이 여성의 지위 향상과 여성교육을 위하여 조직된 찬양회는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국민의 한 성원으로서의 여성 교육을 위해 국가가 당연히 관립여학교를 설립하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관립여학교 설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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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이후 여학생들에게 가르쳤던 교과서. (이화여대 도서관 제공)

1898년 10월 13일 회원 100여명이 덕수궁 대궐문 앞에 나아가 관립여학교 설립 청원 상소문을 고종황제에게 직접 올렸다. 찬양회 부인 상소에 접한 황제는 즉각 비답을 내려 학부로 하여금 적절히 조처케 하겠다고 회답을 하였다. 원래 고종은 여성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이화학당에 교명을 하사하여 선교사의 교육사업에도 격려 후원해준 바가 있었다.

그러나 관립여학교의 설립은 황제의 비답만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대신회의를 거쳐야 하는 절차가 있으나 이 정책결정과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 찬양회 회원들은 비답 자체가 곧 설립성취의 약속으로 알고 일주일만에 비답 실행을 독촉하는 청원을 학부대신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그 한해가 다 지나도록 정부측에서의 설립준비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찬양회에서는 1899년 2월말까지는 여학교 설립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고 여학생을 이미 선발해 놓고 기다리고 있던 터이라, 정부의 미온적 태도에 초조해진 찬양회 측에서는 하는 수 없이 1899년 2월 26일 서울 어의동(於義洞, 느릿골)에서 여학생 30명으로 관립여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될 때까지라는 조건 아래 순성여학교를 개교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에 의해 특히, 한국여성에 의해서 설립된 최초의 여학교였다.

여학생의 연령은 7, 8∼12, 13세였고, 이 학교의 교육정도는 초급과정이며 교과서는 학부에서 제정한 것을 채택하였다. 갑자기 문을 연 여학교라 개교 당초에는 교과과정도 마련되지 않았고 교사도 확보되지 못한 형편이었다. 관립여학교가 설립될 경우 실시하고자 만들어 둔 ‘학부의 규칙’을 보면 초등과정과 중등과정으로 나뉘고, 초등과정으로서 심상과를 두어 수신, 독서, 습자, 산술, 재봉을 가르치고 중등과정으로서 고등과를 두어 수신, 독서, 습자, 산술, 작문, 재봉, 지지, 역사, 이과, 국어를 가르치게 되어 있다.

사재 털어 학교 운영하고 교육까지 도맡아

찬양회는 부회장인 김양현당을 교장으로 임명했고, 찬양회 서기로 뽑힌 고정길당을 유일한 전임교원으로 하였다. 또 우리말과 한문에 능통한 그러면서도 무보수로 봉직해 준 외국부인(여선교사)을 교원으로 하여 순성여학교를 운영하였다. 고정길당은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태서신사 등을 교수했고, 또 자봉침을 구하여 기계화 재봉교육을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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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이후 여학생들에게 가르쳤던 교과서.

(이화여대 도서관 제공)

김양현당과 찬양회 회원들은 순성여학교를 임시로 개설하고 이를 관립여학교로 만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학부에 청원서를 여러 번 보냈고, 또 여학생 수십 명을 이끌고 학부에 직접 가서 학부대신 앞에서 배운 바를 시독(試讀)한 후 여학교를 신속히 설립해 줄 것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여학교 운영에서 제일 어려운 점은 재정곤란이었다. 1899년 후반기부터는 찬양회 활동의 약화로 인하여 학교 운영에 도움을 받지 못하는 형편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김양현당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학교를 운영하고 교과교육까지 담당하며 학교를 지탱해 나갔다.

김양현당은 1903년 3월에 병사할 때까지 우리 나라 초기 여성교육을 위하여 전심 전력을 기울였던 우리 나라 여성교육의 선각자였다. 그는 못다 한 여성교육을 다음과 같이 염려하면서 죽음을 맞았다.

“나 일개 여성으로 우리 나라 여자를 외국과 같이 문명 교육하기를 주야로 천지신명께 축도하였더니 불행히도 명이 길지 못하여 구천에 가노라. 내 죽은 뒤 누가 이 학도를 교육할까 염려되노라.”

순성학교의 활동은 주로 대외적인 것으로 학교 설립운동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 반면에 실제 교육면에 있어서 재정상의 문제로 내적인 충실은 기하지 못했다. 순성학교의 원래 목적인 관립학교 설립은 끝내 실패로 돌아갔으나, 정부의 여성교육에 대한 무관심을 일깨웠고 여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사회 전반에 인식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우리 나라의 여학교 설립이 대부분 부인회 조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특수한 형태를 전형화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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