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정민 교수, 『범죄소설의 계보학』 출간

추리소설 속 계급·성차별 등 이데올로기 분석

 

범죄 소설의 계보학을 출간한 계정민 교수.
'범죄 소설의 계보학'을 출간한 계정민 교수. ⓒ계정민 교수

“미스 마플의 범죄수사는 여성에게 적용되는 젠더 규범을 위반하는 행위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나이 든 독신여성’이라는 미스 마플의 이미지가 가부장적인 감시를 무장 해제시키는 ‘위장술’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범죄소설의 계보학』의 저자 계정민 계명대 교수는 범죄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탐정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범죄 소설의 계보학』은 뉴게이트 소설에서 추리소설을 거쳐 하드보일드 추리소설로 이어지는 범죄소설의 궤도를 따라가며 그 과정에 숨겨진 뜻을 분석한 책이다. 계 교수가 범죄소설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1년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는데 1990년부터 미국에서는 범죄소설의 학문적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지던 시기였습니다. 범죄소설이 가장 핫한 분야로 논의되고 있는 데서 오는 문화적 충격이 컸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자연스럽게 범죄소설을 다루는 수업을 들으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1986년 출간된 아서 도난 코일의 셜록 홈즈 : 완전한 소설과 이야기(Sherlock Holmes: The Complete Novels and Stories) 1,2권 표지.
1986년 출간된 아서 도난 코일의 '셜록 홈즈 : 완전한 소설과 이야기(Sherlock Holmes: The Complete Novels and Stories)' 1,2권 표지. ⓒbantam book

계급 이데올로기에 저항한 ‘뉴게이트 소설’ VS 재생산 한 ‘추리 소설’

그가 가장 먼저 주목했던 건 빅토리아시대(1837~1901) 대표적인 범죄소설이었던 ‘뉴게이트 소설’이다. 사회적 모순에 대한 문제의식과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향한 비판정신을 담은 뉴게이트 소설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견줄 정도로 강렬했다.

“기본적으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대립하고 충돌하고 저항했던 범죄소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뉴게이트 소설 같은 경우는 당대의 계급 이데올로기에 저항했습니다. 범죄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서 기인하며 범죄자 개인에 대한 처벌은 부당한 계급적 탄압이라고 주장한 거죠.”

뉴게이트 소설의 추락과 맞물려 유럽에서 혁명의 시대가 저무는 시점에 혁명의 근원지였던 파리를 배경으로 ‘추리소설’이 태동한다. 왜 탐정은 귀족적인 백인 남성인가, 성공한 여성탐정은 왜 나이 많은 비혼 여성이어야 하는가 등 추리소설 속에 녹아있는 당대의 젠더 이데올로기를 파헤치는 시선은 보는 이들의 흥미를 유발한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소설과 관련해서 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시절, 추리소설을 조사해보니 여성탐정 추리소설이 붐을 이루다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추리소설은 가장 이상적인 남성성을 전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젠더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성탐정 추리소설은 열심히 타협하고 살아남기 위해 애썼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몰락하고, 유독 나이든 비혼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여성탐정 추리소설은 살아남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뉴게이트 소설이 계급 이데올로기에 저항한 반면 추리소설은 당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재생산하는 역할을 했다. 계 교수는 먼저 추리소설 속 탐정 대부분이 귀족적인 백인 남성인 점에 주목했다.

“‘탐정은 왜 귀족적인 백인 남성인가’라는 부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통적인 추리소설에서는 상류계급 출신 백인남성이 탐정을 맡아 하류계급 출신의 유색인종 범죄자를 체포합니다. 계급적으로 지배계급의 우월성을 드러내는거죠. 범죄의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 캐릭터가 맡고 귀족적인 백인 남성 탐정은 그들을 보호하고 범죄로부터 구해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지배계급을 찬양하고, 백인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합니다. 젠더 이데올로기에 있어서는 가부장적, 남성 우월주의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 거죠.”

 

영국드라마 아가사 크리스티 : 미스 마플 스킬 컷.
영국드라마 '아가사 크리스티 : 미스 마플' 스킬 컷. ⓒ뉴시스

추리소설 속 여성탐정의 등장과 ‘미스마플’의 성공

19세기 말 미국과 영국 등에서 여성해방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전적으로 남성의 영역이었던 추리소설에 여성탐정이 등장한다. 여성탐정 추리소설의 경우 ‘여성탐정’의 존재를 통해 전통적인 젠더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형태를 보였지만 한편으로 협상하고 순응하는 두 가지 입장이 공존한 장르다.

“여성탐정은 외모가 추하거나 굉장히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여성, 기괴한 여성으로 배제시키거나 수사에 있어서 남성탐정의 순종적인 보조자 역할만 맡게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이들 자신이 탐정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성이 할 만한 일이 아닌데 상황이 안 좋기 때문에 한다는 식의 비하적인 여성을 재현합니다.”

여성탐정 추리소설은 소리 없이 사라졌지만 1890년대부터 1930년대 무성성이 강조된 나이 많은 비혼 여성이 등장하는 탐정 추리소설은 가장 대중적인 추리소설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다. 계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일명 ‘노처녀 탐정 추리소설’이라고 불리는 장르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이 대표적인 예다.

미스 마플은 풍족하고 품위있는 70대를 즐기는 ‘부드럽고 매력적인 태도를 지닌 흰머리의 노부인’으로 재현된다. 1897년 발표된 ‘이웃집의 그 일’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여성탐정 버터워스는 상류사회 유력 가문 출신의 50대 여성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여성탐정은 기존의 젠더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재현됩니다. 동시에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여성으로 묘사합니다. 추리소설에 시도된 젠더적 타협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성성이 강조된 여성탐정이 가부장제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도록 함으로써 근원적으로 보수적인 장르가 된거죠.”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경우 계급적으로 굉장히 전복적이고 저항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여성혐오를 이용해 지배 이데올리기와 타협한다. 이를 위해 자본가의 이미지로 재현된 ‘팜므파탈’이 등장한다.

“팜므파탈을 불법적인 방식으로 부를 증식하고 경제적인 욕망이 강한 여성으로 설정함으로써 자본가들에 대한 분노나 적개심을 처리하는 출구로 이용했습니다. 자본가는 건드릴 수 없으니 감옥에서 평생 살거나, 살해당하거나, 자살하는 등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을 팜므파탈이 대신 하게 하는 거죠. 지배계급의 우려와 불안을 약화시키기 위해 처벌의 대상을 자본가가 아닌 팜므파탈로 정하는, 일종의 여성혐오를 이용한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계정민 교수의 『범죄소설의 계보학』 표지. ⓒ소나무출판사
계정민 교수의 『범죄소설의 계보학』 표지. ⓒ소나무출판사

“남성 섹슈얼리티에 관한 책 준비 중”

19세기와 20세기에 그랬듯이 여전히 범죄소설은 계속 경합하고 충돌하지만 동시에 타협하고 협상하면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스웨덴 작가 라르손의 ‘밀레니엄’ 3부작이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밀레니엄’에서는 자본가와 언론이 범죄자로 등장합니다. 이들의 범죄를 수사하고 해결하는 탐정은 하류계급 출신의 젊은 여성이 맡습니다.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젠더적인 측면을 뒤집는 동시에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드러내는 마초적인 측면도 뒤집은 것이죠.”

10여년 간의 연구결과와 논문을 토대로 이번 책을 출간하면서 미뤄놓았던 과제를 마친 기분이 든다는 계 교수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벌써 “다음 책을 구상 중”이라고 답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남성 섹슈얼리티에는 이성애자이고 기혼 남성이어야 한다는 식의 규범적인 기준이 있는 반면 동성애자, 독신 남성 등은 성적인 하위주체가 되버린다”면서 “남성 섹슈얼리티가 어떤 식으로 위계화되서 어떻게 문학적으로 재현되고 있는지 다룰 예정”이라고 말했다. 마치 보물찾기 하듯 범죄소설 속 숨겨져 있는 가치를 파헤칠 그의 새로운 시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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