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염력’ 포스터 ⓒNEW 제공
영화 ‘염력’ 포스터 ⓒNEW 제공

영화 ‘염력’은 ‘부산행’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겉으로 딱히 비슷한 구석이 없음에도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부산행’에 한 번 나오고 ‘염력’에 두 번 나오는 플래시백 때문이다. ‘부산행’ 말미의 난데없는 플래시백을 기억할 것이다. 거기, 천사의 빛깔을 연상하는 은은한 백색을 배경으로 이제 막 태어난 딸아이를 품에 안고 미소를 머금은 아버지가 있다. 감동을 자아내려는 영화의 의도와 달리 많은 관객은 거기서 웃음을 터트렸다. 감정의 선을 깨는 쇼트 배치상의 실수 수준으로 웃고 넘기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반대로 그것이 거기에 반드시 배치돼야 한다는 어떤 소명의 결과라면 상황은 간단치 않다. 아버지의 희생이라는 관념이 맹목적으로 승인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염력’에는 그것과 비슷한 것이 두 번이나 반복된다. 

‘염력’의 아버지는 딸이 어릴 때 집을 나갔다. 딸은 어머니와 함께 생존 서바이벌을 버티는 중이었다. 모녀에게 위기가 닥친다. 힘겹게 일궈놓은 삶의 터전이 도시 재개발 사업 때문에 떠밀릴 상황에 놓인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용역의 횡포에 그만 어머니가 죽는다. 사실상 혼자 남겨진 딸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때 기적이 일어난다. 아버지에게 초능력이 생긴다. 전화 한 통 없던 아버지가 딸의 곁으로 돌아온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붕괴된 가족이 외부의 위기 앞에서 염력을 경유해 복원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다. 

얼개를 다소 길게 소개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명되지 않는 영화의 엉성한 지점을 들추기 위해서다. 무난한 듯 보이지만 ‘염력’의 논리는 의외로 허술하다. 가족 붕괴의 출발점에 아버지의 가출이 있다고 할 때, 이 영화는 이상하리만치 아버지가 집을 나간 이유에 대해 무관심하다. 초능력과 관련해서도 그것이 어머니나 딸이 아닌 하필이면 아버지에게만 주어진 이유 역시 딱히 제시되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재개발 용역의 폭력에 희생된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도 그 분노의 양에 비해 너무 간단히 망각된다. 딸의 생존 터전이 굳이 철거 위기에 놓인 장소여야 하는 사연도 드문드문 설정될 뿐이다. 

이것이 바로 플래시백의 존재 이유다. ‘염력’에서 플래시백은 영화 중간에 한 번, 영화 말미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회상의 주인은 아버지다. 거기, 집을 나가는 젊은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어린 딸이 있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아버지, 떠나는 아버지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딸, 그러니까 눈빛과 눈빛의 교감은 영화의 엉성한 논리를 일거에 봉합하는 정서적 연대의 풍경이다. 과거의 뜨거운 정서로 현재의 엉성한 논리를 눙치는 전략을 비판하자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구축되는 어떤 맹목적인 절차와 관념이다. 사실상 이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아버지의 가출, 아버지의 염력, 어머니의 죽음, 재개발 위기 등을 둘러싼 영화의 허술한 논리는 아버지가 주인인 플래시백을 경유해 아버지의 부재, 아버지의 능력, 아버지의 자리, 아버지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절차에 철저히 종속된다. 영화의 허술한 논리 자체가 아버지를 환기하고, 예비하고, 배려하는 자리였던 셈이다.  

영화가 구축한 필연에 따라 아버지는 딸의 허락과 상관없이, 어머니의 빈자리에 들어와, 자신에게만 부여된 초능력을 이용해, 딸에게 닥친 위기에 저항한다. 염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재개발주의자와의 싸움에서 아버지는 승리한다. 그런데 승리의 기쁨도 잠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염력’의 가장 이상한 선택과 마주한다. 아버지가 경찰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 두 손을 내밀며 자발적으로 체포당하는 것이다. 저항의 정당성과 상관없이 자신은 아내와 딸을 두고 도망친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질문이 생긴다. 그런 마음이라면 딸에게 사과해야지 왜 국가에게 체포당하는가. 이것은 여성(아내와 딸)에게 잘못을 저지른 남성(아버지)이 여성에게 사과하는 대신 또 다른 남성(국가)과 싸우다 그 남성에게 사과하는 비틀린 형상이다. 그러고 보니 ‘염력’은 딸에게 사과하는 아버지의 실체, 그러니까 자신이 그때 왜 떠났어야만 했고, 그것이 왜 잘못된 선택이었으며, 그것 때문에 딸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가와 관련된 아버지의 실질적 속죄에는 철저히 무관심하다. 

 

영화 ‘부산행’ 포스터들 ⓒ영화사 레드피터
영화 ‘부산행’ 포스터들 ⓒ영화사 레드피터

실사영화로 명성을 얻기 전까지 애니메이터 연상호가 줄곧 주목한 대상은 수습 불가능한 삶의 비천한 풍경이었다.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의 발버둥, 발버둥을 칠수록 점증하는 위악의 형상, 그 형상으로 마주하는 죽음보다도 못한 생존, 그 생존에 새겨진 세계의 파열은 연상호 영화의 의미심장한 색깔이었다. 첫 번째 실사영화 ‘부산행’에 와서 연상호는 파열을 봉합할 대안을 찾은 듯 보였다. 영화 전체의 감정선을 깨면서까지 삽입된 플래시백, 즉 아버지의 희생이 그것이다. ‘염력’은 그 선택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강력한 의지의 결과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보다 전면화된 아버지 희생으로 세계의 균열을 단단히 봉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봉합은 난감하다. 잘못의 ‘주체’인 아버지를 잘못을 수정할 ‘주체’로 승인한 후 용서받을 ‘주체’로 승화하는 아버지에 대한 무한 긍정, 즉 아버지라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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