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 확산되며 피해 밝히는 여성 느는데

사실이라도 명예훼손죄로 고소 당할 수 있어

법 조항 폐지 요구 봇물

 

“나도 당했다”며 성폭력 피해 경험을 드러내는 ‘미투’(Metoo) 캠페인이 확산되고 있지만 가해자에게 유리한 법 조항이 여성들의 ‘말하기’를 막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가해자의 언행이 사실이라도 해도 피해자가 이를 공개하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오히려 고소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어렵사리 입을 열어도 오히려 피의자가 되는 어이없는 상황이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최근 몇 달 간 국제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말하기 캠페인이 일파만파 확산됐지만 한국에서는 다른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미투 운동보다 앞서 2016년 ‘문화예술계 성폭력 말하기’를 주도한 여성문화예술연합 소속 이성미씨는 한국에서 피해자의 말하기 확산의 걸림돌로 고소 남발을 꼽는다.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피해자를 즉각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며 대응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말할 권리 자체를 박탈하고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계적 추세처럼 국내에서도 명예훼손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이씨는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말하기 운동이 2016년 10월부터 시작됐으나 2017년 1월 보복성 고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피해자들이 수사를 받고 있거나 크게 겁을 먹고 숨거나 잠적한 상태”라며 “용감하게 고발하고 폭로를 한 후 재판 의지를 갖기 전에 고소가 들어오니 방어에 급급하다. 불기소처분이 나더라도 위축돼서 용기를 내기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란, 형법상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한 경우 2년 이하 징역·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 조항을 말한다. 이에 따라 진실을 말한 피해자 역시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검찰 내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한 서지현 검사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해서 위헌법률심판 소송을 해서 다퉈볼 생각”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예외 상황은 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내용이고 사실을 확인하려고 충분히 노력을 했다, 이런 점들을 입증하면 처벌을 면할 수 있다. 그러나 고소부터 당하고, 공익 여부가 재판으로 가려지기 때문에 피해자는 말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세계 많은 나라들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거나 폐지 논의가 진행중이다. 미국의 경우 1964년 명예훼손 처벌법을 위헌처분한 ‘개리슨 대 루이지애나’(Garrison v. Louisiana) 사건 이후 뉴욕, 캘리포니아 주를 포함한 많은 주들의 명예훼손 처벌조항이 위헌 처분되거나 주 의회에 의해 자발적으로 폐기되고 있다.

유엔 인권위원회, 월드뱅크, 유럽의회의 사무총장 등의 여러 국제기구도 세계 각국의 형사상 명예훼손의 폐지를 촉구한바 있다. 영국이나 뉴질랜드에선 명예훼손죄는 남용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최근 폐기했다. 유엔(UN) 자유권규약위원회도 지난해 11월 우리나라에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권고해 정부는 2019년까지 해당 조항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해야 하는 상황이다.

사실관계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를 처벌하는 규정을 폐지해야 한다는 법 개정안은 역대 국회에서 여러 차례 발의돼왔다. 20대 국회에서는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6년 9월 대표 발의했지만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계류 중이다.

금 의원은 법 개정안 제안 이유로 “명예훼손죄로 인해 정부의 정책, 공직 비리 등에 대한 국민의 자유로운 의견제시·비판·여론형성의 권리가 침해받고 있다”면서 “실제로 진실한 사실을 적시하는 행위를 형사처벌하는 국가는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조현욱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은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말하면 보호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명예훼손죄로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아야 하고,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닌지 오해를 받기도 한다”면서 “국회에서 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황이지만, 변호사들 역시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 폐지에 대해 상당수가 찬성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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