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형석/ 여성문화웹진 <언니네>에서 ‘살균에서 표백까지’를 모토로 세탁소를 운영중인 언니네 편집위원

유난히 동성애에 대한 희화화가 만연한 요즈음, 남성 동성애자를 소재로 끌어넣은 한 개그프로그램을 본다. 동성애자 흉내를 내는 개그맨들을 마치 못 볼 꼴이라도 된다는 듯이 떠밀고 내치는 다른 개그맨들의 찡그린 얼굴들을 보다가, 그 동성애에 대한 공포(혹은 혐오)에 새삼 놀라고 다시 나의 공포에 놀란다. 나의 동성애 공포증.

아주 늦은 나이에 가게 된 군대 훈련소에서의 일이다. 그 훈련소에서의 3주일 동안, 바로 내 옆자리의 한 친구를 통해서 나는 ‘지지리 궁상’ 로맨티스트이자 ‘울트라’ 이성애자였던 내게도 동성애적 욕망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서 설레임을 느끼며, 나는 그것이 다른 어떤 이성과의 연애감정과도 다르지 않은 느낌임을 직감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그것이 친밀함 이상의 감정임이 확인되자마자 내게는 두 번째 과정이 곧바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알지 못할 거북한 느낌들이 그의 앞에서 생겨났다. 그와 은근히 거리를 두고, 그를 떠올릴 때마다 아니라며 뿌리치고, 그의 미소를 소름끼친다고 생각해버리는 정신분열적 상태가 계속된 것이다. 두려웠던 것이다. 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그토록 끔찍하게 공포스러운 것으로 내게 되돌아오는 것일까.

서로 먼 곳으로 따로따로 자대 배치를 받고 석달쯤 뒤에 그가 집으로 전화를 했었더란다. 군대 동기라면서. 그의 이름을 듣고 갸우뚱거렸다. 그때 이미 나는 그 이름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조차 잊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지독하고 끔찍스런 무의식의 망각작용. ‘동성애자 흉내를 내는 개그맨’들을 밀쳐내는 ‘정상적 개그맨’들. 그들의 얼굴에 쓰인 그 표정이란 실은 내가 나의 내면에 숨기고 있는 어떤 표정과 그닥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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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상식적인 수준에서도 타인에 대한 공포증(내지 혐오증)은 납득될 수 없다. 동성애자인 그 누군가 우리의 옆에 있다고 해서 그가 동성애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무슨 전염병도 아닌 터에, 그를 배척하고 비난하며 회피하는 어떤 행동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상식 선에서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 주변의 누군가가 동성애자임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고 해서, 혹은 그들 ‘타인’의 자유에 동의한다고 해서 내 안에 있는 ‘동성애 공포증’이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동성애 공포증’이란 실은 자기 내면에 도사린 스스로의 동성애적 욕망에 대한 공포의 다른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면 그것의 좋은 예일지도 모르겠다.

내게 동성애가 가장 두려운 이유는 남성의 몸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 남성의 몸이 에로틱한 대상으로 떠올려지는 순간, 무의식은 심각한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내게 역겹고 메스꺼운 느낌에 해당하는 신호들을 마구 뱉어낸다. 그렇게 한번 얻어맞은 후에는 지레 슬그머니 유사한 모든 상황들을 회피하고 만다. 남자의 몸을 두려워하는 남자들, 남자의 몸을 사랑하지 못하는 남자들, 바꿔 말해서 스스로의 몸(남자의 몸)을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라는 존재의 비극. 그것은 이 시대, 이 사회 남성들의 비극이다.

유난히도 여성의 육체만을 성애화시킨 이 시대가, 여성에게는 외모에 대한 강박을, 남성에게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준 셈이다. 그렇게 동성애 공포증의 사회병리적 현상을 만들어낸 셈이다.

그러나 내가 내 몸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누가 나의 몸을 사랑할 것인가. 몸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증으로 세상의 절반인 다른 남성들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없다면 그들 사이의 이 지리멸렬한 관계는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여고생들처럼 ‘교환일기’를 쓰지는 못할망정, 각종 욕설과 비속어로 뒤범벅된 쌍소리들로 가장해야만 서로의 친밀함을 드러낼 수 있는 남자들의 위악을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그저 자신의 몸과 사랑에 빠진 나르시스가 왜 남성의 몸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볼 따름이다. 난,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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