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미투(#metoo)’는 할리우드의 캠페인이 아니었다.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을 고발하며 해시태그 ‘나도 겪었다’를 독려한 배우 알리사 밀라노의 트위터 글에는 계보가 있다.

흑인이자 여성인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미투의 창안자다. 그는 이미 10년 전부터 성폭력 피해에 노출된 유색 인종 소녀들의 낮은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공감과 변화를 촉구하는 미투 캠페인을 벌이며 뉴욕 최대의 흑인 거주지인 할렘 커뮤니티의 회복력을 촉진해 왔다. 가장 소외된 곳에서 시작된 “나도 겪었다”의 외침이 겹겹의 용기로 번져 미국 사회뿐 아니라 국제연합 유엔(UN), 더 나아가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성폭력은 여성과 약자에게 가해지는 젠더 폭력인 동시에 권력형 범죄다. 타라나 버크는 초기 미투 활동으로 젠더 폭력을 ‘교차성(intersectionality)’의 맥락 위에 올려놓았다. 할렘에 사는 흑인 여성 생존자의 목소리는 할리우드 백인 여성의 목소리에 비해 배제되거나 지워진다. 유색 인종 여성이 경험하는 성폭력은 사건과 사건 경과 모두에서 젠더뿐 아니라 인종, 계급, 성정체성, 민족, 나이, 지역, 장애 유무에 따라 달리 판단되며 특정 권력 집단의 암합에 의해 가려지고 마는 모순의 총체에 부닥치기 쉽다.

나도 겪었다. 어린 시절 친형제들이 자행한 아동 친족 성폭력을 인지하고 작가가 돼 그 기억을 책 『코끼리 가면』에 담았다. 그저 써야겠다는 절박감이 컸지만 한편 사건이 널리 알려져 가해자들이 거주하는 구미와 경북, 지역 사회 일대에 자정 능력이 발동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출간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할 즈음 공교롭게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국내 성폭력 해시태그 활동이 일었다. 고발과 고백의 활자 사이에서 사이버 연대의 밤낮을 보냈건만 동시에 수십 개로 쪼개진 해시태그들이 그저 기능적이며, 교차적으로 작용하는 중층 억압을 가린다는 인상도 받았다. 한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에 의해 의도적으로 폄하됐는데 계급, 지역, 성정체성 등의 요소가 억압의 매트릭스(matrix of oppression)로 작동했다. 예컨대 오픈리 레즈비언(openly lesbian)으로 정체화한 나는 어쩌면 할렘의 여성들이 경험했을 복합적인 차별에 노출돼,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공론화하고 사회 일반의 공감을 획득하는 데에 중산층 이성애자 여성보다 더 큰 에너지를 써야 했다.

당연히 퀴어 여성도 ‘여성’이다. 여성 퀴어 커뮤니티에 속한 내 친구도 성폭력 피해를 겪었고 옛 친구의 친구도 겪었다. 전 애인과 배우자의 전 애인, 지금 삶을 함께하는 여성 배우자도 겪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가 사회로부터 침묵을 강요받았으며 더 큰 침묵이 우리 곁에 머물고 있음을. 우리는 여성과 약자, 소수자의 침묵을 강요하는 세계의 가리어진 생존자다.

2017년 12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침묵을 깬 자들’을 선정했다. 미투 캠페인에 동참한 성폭력 고발자들은 위세를 몰아 지난 1일 성폭력 공동대응단체 ‘타임즈 업’(Times Up)을 결성했다. 타임즈 업 운동은 성폭력 피해와 백래시(backlash·반격)에 대응하며 상대적으로 더 어려움을 겪는 블루칼라 여성, 유색 인종 여성, 이주 여성, 퀴어 여성의 목소리를 지지하는 광범위한 움직임으로 번지고 있다.

침묵을 깬 자들의 외침은 끝나지 않았다. 흑인 여성 생존자들이 싹 틔운 미투 정신이 국내에서도 더 다양한 목소리를 촉발하길 기대한다. 그리하여 말하기와 쓰기를 주저하고 있는 수천수만 생존자들의 지표와 영감이 되기를. 이에 작은 힘을 보태고자 새로 출간될 『코끼리 가면』 한·영 바이링궐 에디션과 이어 나올 움직씨의 문학 시리즈 이름을 ‘미투(metoo)’라 지어 붙였다. 깊은 침묵 속에서 길어 올린 여성과 약자, 소수자의 목소리를 책이란 견고한 물성 안에 담아내고 지켜내고자 한다. 우리는 함께 더 깊어지고 강해질 것이다.

 

 

노유다 출판사 ‘움직씨’ 공동대표·작가 ⓒ이정실 사진기자
노유다 출판사 ‘움직씨’ 공동대표·작가 ⓒ이정실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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