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화재로 인한 비극이 일어났다. 지난 23일 찾은 서울 종로 서울장여관 방화 참사 현장. 추모객들이 두고 간 국화꽃 다발과 과자 등이 출입구 앞에 놓여 있다. ⓒ이유진 여성신문 기자
또다시 화재로 인한 비극이 일어났다. 지난 23일 찾은 서울 종로 서울장여관 방화 참사 현장. 추모객들이 두고 간 국화꽃 다발과 과자 등이 출입구 앞에 놓여 있다. ⓒ이유진 여성신문 기자

저렴한 숙소 찾는 여성 관광객 많지만

낙후·부실 시설 많아 화재 속수무책

골목 비좁아 소방차도 못 들어와

비극 멈추려면 안전 점검 강화하고

여성 재난대처 역량 높여야

지난달 충북 제천 참사에 이어 또다시 비극이 일어났다. 범인은 성매매를 원했으나 못 했다는 이유로 여관을 불질렀다. 여성의 성을 남성이 통제할 수 있다는 뿌리깊은 여성혐오가 낳은 참사다. 가족여행 중 저렴한 숙소를 찾아온 세 모녀는 뜻밖의 죽음을 맞았다. 자체 소방·대피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낡은 건물이라, 구조나 화재 진압도 애초에 어려웠다. 여성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종로 숙박업소 일대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성의 재난 대처 역량은 남성보다 낮고, 혐오범죄에 노출될 가능성도 높다. 재난 관리에 반드시 젠더 관점을 도입해 정책 전반을 강화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박살 나 까맣게 타버린 건물의 잔해 앞, 누군가가 흰 국화꽃 다발을 올려두었다. 과자, 케익, 빨대를 꽂은 음료수와 캔맥주를 두고 간 이도 있었다. 사흘 전 새벽, 이곳 서울 종로 서울장여관에 한 50대 남성이 불을 질렀다. ‘여관 주인이 성매매 요구를 거절했다’는 게 이유였다. 투숙객 6명이 목숨을 잃었다. 두 딸의 방학을 맞아 서울 여행 중이던 세 모녀도 거기 있었다. “날이 이렇게 추워도 추모객들이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참 안타깝네요”라고 현장을 순찰하던 혜화경찰서 관계자가 말했다. 

 

지난 23일 찾은 서울 종로 서울장여관 방화 참사 현장. ⓒ이유진 여성신문 기자
지난 23일 찾은 서울 종로 서울장여관 방화 참사 현장. ⓒ이유진 여성신문 기자

경찰에 따르면 서울장여관에 불이 난 건 지난 20일 새벽 3시8분쯤이었다. 방화범인 중식당 배달원 유모(53) 씨는 이날 새벽 2시께 술을 마신 후 “여관이 밀집된 골목에 무작정 들어가서 처음 보이는 여관”인 서울장여관에 들어가 업주 김모(72)씨에게 성매매 여성을 불러달라고 요구했다. 김 씨가 이를 거부하자, 유 씨는 경찰에 “여관 주인이 숙박을 거절한다”고 신고했다. 주인도 유 씨를 주취 소란으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출동해 유 씨에게 경고를 주고 여관에서 내보내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유 씨는 이후 근처 주유소에서 휘발유 10ℓ를 사서 여관으로 돌아와 1층 복도에 뿌린 후 불을 질렀다. 그는 범행 후 112에 신고해 자수했다. 경찰은 유씨를 체포하고 현존건조물 방화치사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남성의 뿌리 깊은 여성혐오가 경악스러운 참사를 낳았다. 

하룻밤에 1만5000원짜리 숙소는 투숙객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했다. 화재경보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출구가 막힌 상황에서 순식간에 불이 번졌다. “작은 건물은 설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스프링클러도 갖추지 않은 여관이었다. 애초에 건물은 완전히 고립된 구조였다. 화재가 시작된 1층 정문으론 나갈 수 없었고, 뒷문으로 나가도 지붕과 담장으로 막혀 탈출로가 없었다. 돈을 아끼려고 저렴한 여관을 찾았을 투숙객들은 화재에 속수무책이었다. 

 

 

지난 23일 찾은 서울 종로 서울장여관 방화 참사 현장. 1층 내부는 모두 불타 잔해만 남았다. 출입구 쪽 내실(아래 사진)에 여관 영업주가 앉아 있던 의자가 보인다. ⓒ이유진 여성신문 기자
지난 23일 찾은 서울 종로 서울장여관 방화 참사 현장. 1층 내부는 모두 불타 잔해만 남았다. 출입구 쪽 내실(아래 사진)에 여관 영업주가 앉아 있던 의자가 보인다. ⓒ이유진 여성신문 기자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던 여성들의 허망한 죽음은 안타까움을 더했다. 서울장여관 1층 105호에서 묵었던 어머니 박 모(34)씨와 14세, 11세 두 딸은 지난 15일 전남의 자택을 떠나 여행 중이었다. 세 모녀는 지난 19일 서울에 도착했고, 2~3평 규모의 여관방에서 나란히 잠자리에 들었다. 방화범 유 씨가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지점과 가장 가까운 방이었다. 105호를 포함해 여관 1층 모든 객실 창문엔 쇠창살로 된 방범창이 설치돼 있었다. 화재 사실을 알았다 해도 세 모녀는 꼼짝없이 방 안에 갇혔을 가능성이 높다. 희생자 6명을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사망자 모두 질식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1차 소견을 내놨다.

 

서울 종로 서울장여관의 현장 도면. 세 모녀는 최초 발화지점인 출입구와 가까운 105호에 투숙했다 희생됐다. ⓒ서울 혜화경찰서 제공
서울 종로 서울장여관의 현장 도면. 세 모녀는 최초 발화지점인 출입구와 가까운 105호에 투숙했다 희생됐다. ⓒ서울 혜화경찰서 제공

인근 상인·직장인들은 “종로5가 일대에는 화재 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은 낡은 건물이 많아서 참사가 또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인근 편의점 점주 A씨는 “이 동네엔 섬유·목재 물류창고, 인쇄소 등이 많아서 화재 위험이 높은데, 대부분 중앙계단 외의 비상구는 거의 없어 대피도 힘들 것”이라며 “소방 점검을 하긴 하지만 그때뿐이고 근본적으로 대처에 한계가 있다”고 했다. 인근 동네의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김모(34) 씨는 “불이 나도 골목이 워낙 비좁아 소방차는 절대 들어올 수 없다. 여관에 불났을 때도 소방차는 못 들어왔다”고 했다. 

실제로 여관이 위치한 종로5가 뒷길은 오토바이보다 더 부피가 큰 차량은 지나다니기 어려울 만큼 비좁았다. 화재 당일에도 소방차량 50대가 출동했지만 여관에 접근할 수 없었다. 소방펌프차가 여관에 70m 가까이 접근한 게 최선이었고, 대로변에서 여관 쪽으로 물을 뿌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진화에 약 한 시간이 걸렸다. 

 

대로변에서, 서울장여관이 위치한 종로5가 뒷길로 진입하는 도로는 소방차량이 들어서기엔
 비좁았다. 화재 당일에도 소방차량 50대가 출동했지만 결국 접근할 수 없었다. ⓒ이유진 여성신문 기자
대로변에서, 서울장여관이 위치한 종로5가 뒷길로 진입하는 도로는 소방차량이 들어서기엔 비좁았다. 화재 당일에도 소방차량 50대가 출동했지만 결국 접근할 수 없었다. ⓒ이유진 여성신문 기자

재난에 취약하고, 유흥업소가 즐비한 이 골목은 알고 보니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동대문·명동 등 서울 도심 관광에 유리한 입지 조건, 여러 중저가 숙박업소 때문이다. 23일 기준 서울장여관 골목엔 게스트하우스, 호스텔, 여관 등 숙박업소 11곳이 영업 중이었다. 특히 단기 체류 여성 관광객들이 많다고 한다. 한 게스트하우스 직원은 “일본이나 중국 여성 관광객들이 자주 온다. 아예 여행사에서 쇼핑코스 패키지로 이 부근 숙박을 추천하기도 한다. 단기 실속파 여행객들은 가끔 1~2만원대 여관에도 묵으시더라”라고 말했다. 

재난 대비 상황에 관해 묻자 이 직원은 난색을 보였다. 이 게스트하우스 건물의 1층 창문엔 모두 방범창이 설치됐다. 창을 열면 옆 건물 벽에 손을 뻗어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건물과 건물 간 간격이 좁았다. 출입구는 가파른 계단 통로 하나뿐이다. 직원은 “재난 대응 기본 훈련을 받은 적은 있고, 여차하면 쓰려고 소화기를 눈에 띄는 데 가져다 두고 있다. 하지만 비상시 손님들을 잘 대피시킬 자신은 솔직히 없다”고 말했다. 

 

서울장여관 부근 한 게스트하우스 건물 1층 창문엔 모두 방범창이 설치됐다. 반대편
 창은 옆 건물 벽과 거의 맞닿아 있었다. ⓒ이유진 여성신문 기자
서울장여관 부근 한 게스트하우스 건물 1층 창문엔 모두 방범창이 설치됐다. 반대편 창은 옆 건물 벽과 거의 맞닿아 있었다. ⓒ이유진 여성신문 기자

맞은편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있다는 미국 관광객 미셸(21) 씨는 “여행 비용을 아끼려고 중심지에 가깝고 최대한 저렴한 숙소를 찾아왔다”며 “비상 시 대피 요령 안내는 받지 못했다. 방에도 TV와 침대만 있지 대피 안내 정보 메모는 본 적 없다”고 했다. 그가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는 낡은 여인숙을 개조한 건물로, 화재경보기는 있으나 1~2층 계단과 복도엔 소화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직원은 “소화기는 리셉션 데스크에만 두고 있다”고 말했다. 또다른 게스트하우스에 투숙하며 서울을 여행 중인 대학생 김세연·문채현(22, 대구 영진전문대) 씨는 “중고등학교 때 대피나 소화기 사용 훈련은 해봤지만 대학에 와선 한 번도 받은 적 없다”고 했다. 

 

모든 재난 상황에서 대피 방법 인지율은 남성이 여성보다 약 2배 정도 높았다. ⓒ김동식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젠더리뷰』 2016년 겨울호
모든 재난 상황에서 대피 방법 인지율은 남성이 여성보다 약 2배 정도 높았다. ⓒ김동식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젠더리뷰』 2016년 겨울호

안전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지만, 여성들은 늘 ‘재난 약자’였다. 한국 여성의 재난 교육이나 훈련 참여율은 남성보다 몹시 낮다. ‘교육 내용 등 관련 정보를 몰라서(80.6%)’, ‘관련 교육기관이 어디인지 몰라서(78.5%)’, ‘받을 만한 교육과정을 몰라서(63.2%)’가 주된 이유였다. 김동식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젠더리뷰』 2016년 겨울호에 기고한 재난 안전역량 실태조사 결과다. 임산부, 65세 이상 고령자, 장애인 등 여성 사회약자의 재난 교육·훈련 경험률은 눈에 띄게 낮다. 사회가 안전을 담보하지 못할 때, 약자들은 더욱 큰 피해를 입게 마련이다. 여성의 재난 대처 역량은 남성보다 낮고, 혐오범죄에 노출될 가능성도 높다. 

최근 서울시는 재난·재해 대응 기본정보를 담은 ‘서울여성안전설명서’ 소책자를 펴냈다. 엄규숙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장은 “다양한 이유로 일상에서 안전 교육과 응급처치를 쉽게 접할 수 없는 여성들에게 재난대비 필요성을 인식시키고 스스로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고자 한다”고 제작 목적을 설명했다.

서울시의 사례는 시작일 뿐이다. 정부가 성평등 관점을 갖고 재난 위험 관리를 위한 모든 국가정책·계획과 그 의사결정 과정, 재난 피해 조사, 조기 경보, 정보 관리와 교육·훈련을 마련해야 한다는 국제 권고가 있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실행된 바 없다. 가난하고 바쁜 삶에 잠시 쉼표를 찍고자 찾은 공간에서 뜻하지 않게 참변을 당한 여성들의 비극은 멈춰야 한다. 이제라도 국가의 재난관리 정책 전반이 강화돼야 하고, 젠더 관점이 반드시 도입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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