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둘도 많다’(대한가족계획협회) 포스터 ⓒ국가기록원
1983년 ‘둘도 많다’(대한가족계획협회) 포스터 ⓒ국가기록원

나의 초등학교(80년대) 시절 학기 초에는 어김없이 호구조사가 공개적으로 이뤄졌다. 그 중에는 형제자매의 수에 관한 것도 있었는데, 순서는 외동부터 차례로 손을 드는 방식이었다. 그 때 외동인 아이들은 손을 번쩍 들었고 주변의 아이들은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형제의 수가 2명, 3명, 이렇게 한 명씩 늘어날 때마다, 급기야 셋을 넘으면서부터는 웅성웅성 거리거나 킥킥거리는 소리가 났고 당사자들은 소심하게 손을 반만 들고 선생님과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얼른 내렸다. 이러한 분위기는 지금과 사뭇 다르다. 그 때는 각 반의 학생 수가 너무 많아 수업을 오전·오후로 나눠하던 시기였고,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대대적으로 홍보되던 시기였다.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가는 대신 남성들은 정관수술을 하고 보건소에서는 집집마다 돌며 여성들을 모아 무료로 불임수술을 해주었다. 그런데 보건소마다 수술 건수가 많을수록 국가로부터 지급되는 보조금이 많아져서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거의 반강제로 수술한 경우가 태반이었고, 허술한 시술 및 사후관리로 부작용으로 고통 받는 여성들이 많았다.(2017년 9월 28일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기자회견 발언 중 일부) 

반면 지금은 난임 부부에 대해 시술비를 지원하기도 하고 무슨 경품마냥 아이를 낳을 때 마다 축하비와 지원금을 지자체에서 지급하기도 한다. 불과 몇 십 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일들이다. 이 대조적인 이야기의  중심에는 분명한 것이 한 가지 있다. 국가가 특정한 목표를 가지고 인구를 통제하려고 하는 인구 정치,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개인의 존엄한 신체와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침해해도 된다는 믿음이다. 1970–80년대 여성의 건강을 위협하고, 안전하지 못한 피임기구와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보급하는 가족계획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는 국가였다. 가족계획을 빌미로 경제개발 계획을 성취할 수 있었고, 해외에서 막대한 자금을 원조 받았으며, 가족계획에 지원된 기금은 여성의 건강이 아닌 국가 주도의 과학기술 육성에 동원됐다. 2018년 저출산 정국에서 ‘생산 가능한 인구가 줄어든다’, ‘세금 낼 사람이 없어질 것이다’라는 언설을 통해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을 비난하고, 출산을 강요하고 있는 국가의 목표 역시 분명해 보인다. 

인간이 다음 세대를 재생산하고 길러내는 판단과 과정은 국가가 직접 통제할 부분이 아니다. 가족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일은 개인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구성원의 선택에 따라 다양하기에 획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국가의 역할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침해받지 않고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단을 위한 국제행동의 날’이었던 지난해 9월 28일 기자회견에서 여러 명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사례를 낭독하며 낙태죄 폐지를 촉구했고, 같은 해 12월 2일 검은시위에서는 수 백 명의 사람들이 함께 낙태죄 폐지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했다. 이것은 태아의 생명을 가벼이 여겨서도 아니고 무책임한 성생활을 위한 주장도 아니다. 오롯이 개인에게 결정권이 주어져야 할 재생산권의 권리가 ‘낙태죄’라는 형법을 통해 국가가 개입하고 있으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여성들의 몸과 마음에 남는 것에 대한 폭로와 저항이었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서 재생산은 기본이 되는 중요한 부분임에도 그 접근법은 너무나 근시안적이다. 전체 맥락은 무시한 채 단지 임신중단이라는 하나의 행위를 부각시키고 범죄화하는 것으로 출산율을 올릴 수 있다는 생각은 재생산을 과정으로 보지 않고 낙태를 금지시켜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얄팍한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재생산에 관한 권리를 가지며, 이를 국가가 보장하는 것만이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방안일 것이다. 그러니까 모두를 위해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 낙태죄 폐지는 사회구성원의 재생산 문제를 풀어가는 실질적 논의를 시작하는 지점이다. 다양한 사회적 조건 안에 위치한 개인의 건강, 임신, 출산, 양육, 가족 구성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바라보며 보다 큰 틀 안에서 논의를 하는 것이 불필요한 이분법적 논쟁을 넘어서는 생산적인 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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