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오로라 드 디오스 필리핀 미리암대학 교수

두테르테 대통령의 ‘강간 조크’ 심각

여성 의원이 반대 목소리 내자

“섹스비디오 유포하겠다” 협박도

500만 여성이 ‘미투’ 운동 벌여

“국가에 자유를, 여성에게 자유를”

민주화 과정서 여성해방도 똑같이 중요

‘페미니스트 프라이데이’ 통해

일상 속 페미니즘 확장 추진

 

오로라 드 디오스 필리핀 미리암대학 교수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오로라 드 디오스 필리핀 미리암대학 교수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오로라 드 디오스(Aurora de Dios, 여성과젠더 연구소 소장) 필리핀 미리암대학 교수는 마르코스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학생운동 지도자였다. 마르코스 몰락 후 취임한 코라손 아키노(애칭 코리) 대통령 집권 당시에는 필리핀 여성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는 유엔(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23인 중 한 사람으로 발탁돼 각국에서 벌어지는 여성차별 문제를 비판하며 세계 여성인권을 위해 일해 왔다. 그는 이화여대에서 열린 국제포럼에 참석해 ‘아시아 여성인권: 여성의 몸, 섹슈얼리티, 폭력’이라는 주제 아래서 민주화 속에서 페미니스트들의 운동과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폭력정치에 대해 비판 했다.

 

-필리핀 민주화운동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마르코스 정권이 1972년 9월 11일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3500여 명이 국가권력에 의해서 살해됐고 많은 사람이 실종됐으며, 시위하던 여성들은 살해, 강간, 성고문의 희생자가 됐다. 당시 필리핀에는 정치범만 6만여명에 이르렀다. 당시 학생운동의 대변인이었던 나는 위험을 피해 지하로 숨어야 했다. 정부는 미디어를 통제했고 농부, 노동조합을 탄압했고 오직 외신만이 필리핀의 독재와 인권유린을 보도할 뿐이었다. 교회, 시민들은 도망 다니는 학생들을 숨겨주며 새로운 시대를 기다렸다.

군사독재 정권은 두려움이 없었다. 1983년 마르코스를 반대했으며 8년의 감옥 생활 이후 치료차 미국에 머물렀던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가 필리핀으로 돌아오자 공항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시민들은 분노했고, 그의 장례식에 300만명의 시민이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함께했다. 그들은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고 깨닫게 됐다. 이것은 강력한 민주화운동으로 확산됐다. 결국 1986년 필리핀은 대통령 선거를 앞당겨서 하게 됐다. 니노이 아키노의 부인 코리 아키노와 마르코스와의 대결이었다. 선거는 형식적인 것이었고, 정부는 마르코스의 승리라고 거짓 발표를 했다. 그러나 군부 내 마르코스를 반대하는 소수 군인의 쿠데타와 시민들의 거센 시위로 코리 아키노가 정권을 잡고 새로운 민주화의 시대가 열렸다.”

 

-민주화 과정 속에서 페미니스트들의 참여는?

“마르코스 정부에서 여성부는 대통령 부인이었던 이멜다가 주도했다. 어떠한 여성단체도 함께 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리 아키노의 선거기간 동안 약 85개의 여성단체가 협력했다. 코리 아키노는 여성 운동가들을 내각으로 불러들였다. 그때 나는 필리핀 정부의 여성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고 그 이후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발탁돼 1998년까지 일을 했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즉시로 우리는 여성 인권의 이슈를 정치에 반영했다. 동시에 일상 문화 속에 페미니즘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페미니스트 프라이데이(Feminist Friday)’는 대표적인 운동이다. 3명이 모여 함께 차를 마시기도하고, 페미니스트 학교를 열어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페미니즘 이야기를 했다. 우리들의 주제는 성매매, 레즈비언, 가정폭력 등등 다양했고, 직접 생존자 당사자들을 불러서 목소리를 들으며 배웠다.

서구에 많은 이론서가 있었지만, 우리는 지역 페미니즘을 강조했다. 이런 일들은 NGO와 밀접하게 연결하여 진행되었다. 그 이후 필리핀 여성들의 경험에 기반을 둔 많은 책이 나오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가브리엘라와 같은 여성연대가 만들어졌다. 좌파, 온건파, 페미니스트들이 함께 한 모임이었지만 후에 여성 이슈를 소홀하게 여기는 좌파에 의해서 장악되었고 결별했다. 페미니스트들은 “국가에 자유를, 여성에게 자유를”을 주장했으며, 여성의 자유가 민주화와 똑같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위원의 역할은 무었인가.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위원으로 일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각 나라에서 온 여성들의 보고서를 들어야 하고 그 이전에 엄청난 자료를 읽어야 한다. 하지만 각 나라의 젠더 정책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독립적 파워가 주어지는 명예로운 자리이기도 하다. 이 자리를 수락하기 전에 나는 함께 일했던 NGO 활동가들을 찾아갔다. 내가 그 일을 해도 좋으냐고 먼저 물었고 그들은 UN에 좋은 영향을 미치라고 말했다. 만약 잘못하면 내게 토마토를 던지라고 부탁했었다.

사람들은 종종 리더가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척하지 말아야 한다. 때론 ‘no’ 라고 말할 수 있고, 실수도 할 수 있다. 그곳에서 나는 어떻게 인신매매가 이루어지고 성소수자 문제가 다뤄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여성 문제가 나타나는지 더 많이 배우게 되었다. 아프리카에는 일부다처제 말고도 로볼라제도가 있다. 아내가 죽으며 아내의 여동생과 자동으로 결혼하는 풍습이다.

그리고 학교와 지역으로 돌아와 UN에서 나온 기본개념을 단순화시켜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했다. 그것은 선생으로의 중요한 일이다. 록 밴드를 불러 콘서트를 한 적이 있다. 내 아들이 록 뮤지션인데 그의 친구들에게 우정 출연을 요청했고 42명의 록 밴드와 저녁 7시에서 새벽 3시까지 록 페스티벌을 했다. 나는 그곳에서 저 멀리 UN에서 이야기 되는 여성인권이 아니라 각 지역, 각 나라의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영웅들의 이야기들을 했다. 그들의 행동이 공동체를 바꾸고, 국가를 바꾸고 결국 세계를 바꾸는 것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 우리 모두 임파워먼트 서클(circle of empowerment)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 아시아 여성운동에 관여하게 된 계기는?

“1995년 베이징 여성대회는 터닝 포인트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곳에서 각각의 나라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을 계기로 많은 아시아 태평양 여성워치(Asia pacific woman’s watch)와 같은 지역 단위의 많은 단체들이 생겨났다.

아시아 페미니즘은 멈춰지지 않고 계속 움직여나간다. 그들의 전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구 여성들은 LGBT 이슈가 심각한 이슈였고, 인도와 필리핀 등 아시아 지역에서는 빈곤의 문제가 중요한 이슈였다. 성매매의 경우에 개도국의 경우에 생존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나 선진국에서의 성매매는 루이비통을 사기 위해 성매매를 한다고 보고된다. 상업주의가 성매매를 하게 하지 않는가? 이것 때문에 어린소녀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쳐야 한다,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알려야 한다.”

- 이번 국제 포럼에서 당신은 두테르테 대통령의 포퓰리즘(인기 영합주의)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정미례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대표는 마약과의 전쟁은 시민들을 위해 중요한 이슈인데 왜 그런 행동이 페미니즘을 탄압하는 것으로 보느냐고 질문하기도 했는데.

“두테르테 같은 정치인이 등장할 것이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범죄, 납치 마약 중독 등을 집권 이후 6개월 안에 모두 없애겠다고 약속했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 외국으로 송출된 이주 노동자들을 도울 것이라고 했다. 포퓰리즘은 별도 달도 따주겠다고 약속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선거기간동안 상대방 정치인들을 게이같이 유약해서 그런 일들을 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포퓰리즘의 특성은 자신만이 국가를 바꿀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Vs 적들’ 이라는 어법을 사용해 엘리트, 제국주의자들을 적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자신들만이 진정으로 사람들을 위한 지도자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빈곤하고 주변화된 사람들의 불만 두려움, 피곤함을 이용한 것이다.

실제로 두테르테는 민다나오 출신의 부자 가문 출신이며 지난 22년 동안 다바오 지역의 정치가였다. 그는 마르코스의 아들과 함께 선거 캠페인을 했고 2016년 11월에 마르코스를 국립묘지에 안장시키는 것을 허용했다. 사람들은 영웅들 사이에 한 명의 도둑이 함께 묻혔다고 말한다. 그는 새로운 개혁을 일으킬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종종 필리핀 깃발에 키스하며 민족주의를 선동한다.

그의 강간 조크는 끔찍하다. 영웅적인 일을 하는 사람에게 세 명의 여자를 강간해도 용서를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1989년 강간 후 살해당한 여성 선교사에 대해서, 얼굴이 예뻐서 자신이 먼저 (강간)했을 것이라고 까지 말했다. 호주 정부의 비난이 있자 대통령이 되면 외교를 끊어버리겠다고 응답했다. 그는 마약과 폭력을 없애겠다고 하며 불법적인 살인을 저지르며 마초 문화와 성차별 문화를 확산하고 있다.

여성단체들이 두테르테 강간 조크를 문제 삼아 기자 회견을 가졌었다. 그러자 SNS에서 그의 지지자들이 기자회견에 참여한 모든 여성들에게 강간 살해를 하겠다는 협박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중 한 수녀는 6000건의 메시지를 받았다.

두테르테를 반대한 여성 의원 레일리 드 리마(Leila de Lima)에게는 섹스비디오가 있으니 유포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여성들은 두테르테에 저항하며 또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500만명의 여성이 ‘미투(me too)’ 운동을 벌이며 리마 의원을 응원했다. 결국 동영상은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페미니스트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또다시 다양한 방식으로 두테르테 정권을 비판하고 집결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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