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물 서사에 ‘청춘’ 아닌

60대 여성 등장시킨

단편드라마 ‘낫 플레이드’

 

지난 13일 tvN의 단막극 프로그램 ‘드라마 스테이지’에서 방영된 ‘낫 플레이드’의 한 장면. ⓒCJ E&M
지난 13일 tvN의 단막극 프로그램 ‘드라마 스테이지’에서 방영된 ‘낫 플레이드’의 한 장면. ⓒCJ E&M

내게는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래서 모정의 강조가 엄마를 넘어서 할머니에게까지 미치는 픽션들엔 공감하기가 어렵다. 영화 ‘집으로…’ 개봉 당시 420만 명의 관객들이 기역 자로 꼬부라진 허리가 한없이 땅에 가까워지면서도 부지런히 지팡이를 짚으며 손자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김을분 할머니를 보며 아련한 향수에 젖어 눈물을 쏟아냈고,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난다’며 이구동성으로 감동을 전했다. 김 할머니는 언제든 고향에 돌아가면 그 자리에서 나를 반겨줄 것 같은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그런 격렬한 감정이 오히려 낯설었다. 할머니들이 할머니 개개인이 아니라 자식들과 손주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모습이 데면데면했다. 

설령 한국 사회의 할머니 대부분이 그렇다 한들, 그렇지 않은 할머니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할머니들의 모습도 보고 싶은데, 영상물 속 할머니들은 화면 뒤쪽에서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모든 잘못과 실수와 죄를 포용하는 너른 대지 같은 모성으로만 존재했다. 2017년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볼 때 영화의 어떤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좀 더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던 건, 고통스러운 과거에 굴하지 않고 자기 한 몸을 스스로 건사하며 ‘이젠 나를 더 귀하게 생각하겠다’고 다짐하는 나옥분 할머니의 의지를 응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혈연의 일부로서만 기능적으로 제시되는 여타의 할머니들과 다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지난주 tvN의 단막극 프로그램 ‘드라마 스테이지’에서 방영한 ‘낫 플레이드’를 봤다. 주인공은 64세 할머니 나인숙이다. 개인택시 운전기사인 남편 박봉철, 무역회사에 다니는 철없는 아들 박기현, 주말도 반납해야 하는 주간지 기자인 며느리 영실, 언어치료를 받았던 어린 손녀 보미를 두루 살피고 챙기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가 친구로 살갑게 지내는 시댁 형님 점례로부터 ‘아르바이트가 오히려 노년의 삶에 활력이 된다’는 얘길 듣고 덥석 부업에 나선다. 인숙에게 배당된 아르바이트 장소는 동네 당구장이다. 사장 성욱은 과거에는 아시안 게임에도 출전할 뻔했던 나름 프로 유망주였으나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당구장 하나의 월세를 내기에도 빠듯한 형편이다. 

인숙은 한산한 당구장에서 평화롭게 청소를 하던 중, 구슬치기로 동네를 제패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호기심에 당구 큐대를 잡아본다. 그리고... 그녀의 숨겨졌던 재능이 폭발한다! 이제는 누워서 천장만 올려다봐도 네모난 당구대가 그려지고 당구공이 굴러가야 하는 길이 보인다. 야채를 썰 때 도마 위의 손가락은 나도 모르게 큐대를 잡는 모양을 취한다. 인숙의 재능을 뒤늦게 알아챈 성욱은 인숙을 이용해 현재의 경영난을 타개하고 자신의 앞길도 틔워보려는 계획을 세운다. 

1시간이 좀 넘는 시간이 후딱 흘러갔다. 수오 마사유키의 영화 ‘쉘 위 댄스?’를 떠올리게 하는 구성, 그러니까 현실에만 충실하게, 다른 오락거리 없이 성실하게만 살아온 주인공이 자신과 아무 상관 없다고 여겼던 어떤 세계와 우연히 접하고, 용기를 내어 한 발자국 내딛고, 뜻하지 않게 그 분야에 점점 애정을 쏟게 되고, 좋아하니까 더 잘하고 싶어지고…. 그렇게 자신의 재능뿐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까지 찾아간다는 성장 스토리였다. 

그리고 그 스토리의 주인공은 할머니다. 언제나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며 그늘 아래로 물러나 있는 것으로만 그려지던 할머니. 그가 입을 연다. ‘아내=집안의 일꾼’으로만 생각하는 퉁명스러운 남편에게 대들고, 자신을 이용하려 했던 당구장 사장에게 딱 잘라서 거절의 뜻을 표한다. 평생 가족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되는 형님에게, 그리고 육아와 가사와 직장을 병행하는 게 힘든 며느리에게 따뜻한 격려와 위안을 건넨다. 할머니가 입을 열어 자신의 말을 꺼낼 때마다 드라마는 변곡점을 지난다. 할머니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 하는지 깨달으면서 주변 사람들을 예전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에 따라 주변 사람들도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바뀌어간다. 

특히 할머니의 도움을 가장 크게 받은 며느리가 할머니의 엄청난 존재 가치를 가장 잘 파악한다. 드라마 초반에는 시어머니에게 어린 딸을 떠맡기다시피 하고 회사로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던) 며느리 영실이 시어머니의 취미 생활을 응원하고, “어머니 좀 많이 도와드려”라고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남편에게 “나는 최선을 다하고 이어. 당신은 왜 안 해? 효도는 셀프야!”라며 따끔하게 경고하고, ‘할머니’라는 주제로 기획 기사를 작성한다. 그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에서 할머니가 ‘파업’한다면 엄청난 혼란이 몰아닥칠 것이다. 한국 사회는 할머니들의 출혈노동으로, 가정과 사회의 빈틈을 겨우 메꾸고 있다. 

 

지난 13일 tvN의 단막극 프로그램 ‘드라마 스테이지’에서 방영된 ‘낫 플레이드’ ⓒCJ E&M
지난 13일 tvN의 단막극 프로그램 ‘드라마 스테이지’에서 방영된 ‘낫 플레이드’ ⓒCJ E&M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야기, 사회적 약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을 것이)다’라는 편견이 존재하는 것 같다. ‘낫 플레이드’는 그 편견을 보기 좋게 부숴버린다. 훈훈한 성장물의 서사에 ‘청춘’이 아닌 60대 여성을 등장시켰고, ‘시간 안에 공을 움직이지 않으면 실격 처리’되는 당구 경기 룰인 ‘낫 플레이드(not played)’를 통해 주인공이 타의로,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가둬왔던 틀을 깨고 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다는 결말은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안겼다. 

60대 여성을, ‘할머니’를 오열과 상처의 현재진행형으로만 그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모습으로 완성한 게 이렇게 아름다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우리의 상상력은 이렇게 빈곤하기 때문에, 보지 않으면 믿지를 못한다. 주체적인 여성들이 미디어에 더 많이 등장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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