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책 『무지무지 힘이 세고 대단히 똑똑하고 아주아주 용감한 당글공주』(2002)의 한 대목. ⓒ인터파크도서/우리교육
동화책 『무지무지 힘이 세고 대단히 똑똑하고 아주아주 용감한 당글공주』(2002)의 한 대목. ⓒ인터파크도서/우리교육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동화작가 임정자는 한 권의 책을 펴내면서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많이많이 칭찬해 주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병마와 싸우고 있는 아이들 전부를 말입니다. 그 아이들은 고통을 이겨 내어 그만큼 사는 힘이 세지고 마음의 키가 자라날 아이들입니다. 아무리 평범해도, 누가 뭐라 해도 무지무지 힘이 세고, 대단히 똑똑하고, 아주아주 용감한 당글공주들입니다.”

이 머리말에 나오는 동화의 주인공 당글공주는 아름다운 놀이성을 차지하려는 괴물과 맞서 싸운다. 출정을 떠나는 당글공주의 손을 꼭 잡아주던 하얀할머니는 “(괴물과 맞서 싸우는 자는) 외로움과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목숨을 건 싸움터에서 괴물이 무시무시한 독방귀를 뀌어도 당글공주는 있는 힘을 다해 버텼다. 동생 상글이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날 때면 주머니에 간직했던 노래와 이야기를 들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온몸에 괴물의 징그러운 비늘이 덕지덕지 붙었지만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괴물은 결국 놀이성을 차지해보겠다는 말도 안 되는 꿈을 포기하고 멀리멀리 도망가 버렸다. 당글공주는 동생 상글이와 새들과 토끼와 나무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무지무지 힘이 세고 대단히 똑똑하고 아주아주 용감한 당글공주』는 16년 동안 정말 많은 어린이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왕자에게 도움을 받아 괴물에게서 풀려나고 결국 그와 결혼하는 것이 전부인 공주 이야기에 질려 있던 독자들에게 이 동화는 시원한 광장이었다. 초판을 읽은 열 살 어린이는 지금쯤 26세가 되었을 것이다.

2018년 새해에 이 책의 전면 개정판이 나왔다. 당글공주 이야기는 진부하다고 말할 만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당글공주만큼 당당한 여성 어린이 주인공이 나오는 동화는 별로 없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여자 어린이들이 겪는 현실도 얼마나 더 나아졌는지 모르겠다. 아동복 쇼핑몰에는 멍하게 입술을 벌린 채 어깨를 드러낸 포즈의 여자 어린이 모델을 내세우고 교실의 여자 어린이를 향해 ‘룸나무(룸살롱 꿈나무)’, ‘로린이(롤리타+어린이)’라고 부르는 짝꿍과 교사가 있다. 아마도 당글공주를 읽고 자라났을 나이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20세 여성은 화장실에서 정체 모를 남성 괴한에게 습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다. 그는 혼자 가게까지 기어와서 직접 신고 전화를 하고 쓰러졌다고 한다. 2002년의 당글공주는 외로웠고, 2018년의 여성도 여전히 사회적 병마와, 괴물과 맞서고 있다.

무쇠로 만든 동화가 있어 어린이의 삶을 다 바꾸어줄 수는 없겠지만, 페미니즘 동화가 등에 날개를 달아줄 수는 있다. 괴물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당글공주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어린이 자신이지만 기운 센 동화가 있다면 곁에서 소리를 질러 줄 수 있다. 동화 『롤러 걸』에서는 주인공 애스트리드에게 불같은 화를 품고 뛰어보라고, 친구들이 당하는 걸 지켜보지만 말고 있는 힘을 다해서 들이받으라고 말한다. 더 굳세게, 더 강하게, 겁내지 말고 쓸어버리라고 한다. 여자 어린이 주인공에게 ‘들이받다’라든가 ‘날려버리다’ 같은 술어가 부여되는 것만으로도 독자는 지금껏 머물렀던 공간이 얼마나 제한된 것이었는지를 깨닫는다. 이 술어는 용감한 어린이에게라면 공평하게 주어졌어야 하는 것이지만, 수많은 동화에서는 하나의 성에만 이 술어를 사용했다.

기운 센, 무쇠로 만든 동화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그 동화를 찾아서 2002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하는 상황이 안타깝고 그때보다 더 퇴행한 것처럼 보이는 여자 어린이들의 삶이 걱정스럽다. 작가는 대장장이가 아니지만, 글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무쇠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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