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승희 애니메이션 감독

여성의 몸·월경 다룬

영화 ‘피의 연대기’

애니메이션으로

월경혈과 여성의 질

사실적으로 표현

 

영화 ‘피의 연대기’ 애니메이션 스틸 ⓒ김승희 감독
영화 ‘피의 연대기’ 애니메이션 스틸 ⓒ김승희 감독

토끼 한 마리를 손에 쥔 채 푸른 초원 위를 힘차게 달리던 한 여성이 제 발에 걸려 철퍼덕 넘어진다. 그대로 뻗어 누운 그의 몸 아래로 새빨간 피가 번져간다.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의 여성은 감정 없이 말한다. “아, XX. XX 귀찮아.”

여성의 몸과 월경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피의 연대기’에 삽입된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이다. 주제가 주제다보니 월경혈이 흐르는 모습, 월경 용품을 이용하는 방법, 여성의 성기 등이 영화 안에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사로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영화 연출을 맡은 김보람 감독은 “관객 분들이 한 시간 반 동안 편하고 재밌게 즐긴 후 극장을 나가길 바랐다”면서 “시각적으로 최대한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고 말했다. 답은 애니메이션과 일러스트, 음악 등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었다.

김승희 애니메이션 감독의 첫 단편 ‘심경’을 보고 섭외에 나섰다는 김보람 감독의 안목은 정확했다. 김 감독의 특색 있는 그림체와 아름다운 색감은 영화의 밝고 유쾌한 리듬감을 자아내는 데 한몫했다. 김보람 감독은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animated documentary)라는 장르로서, 애니메이션이 단순히 자료화면으로 소비되지 않고 영화의 톤 전체를 가져갈 수 있기를 바랐다”며 “김승희 감독 특유의 선과 구성 방식을 그대로 살렸다”고 설명했다.

 

김승희 감독 ⓒKT&G 상상마당 제공
김승희 감독 ⓒKT&G 상상마당 제공

김 감독은 첫 단편 애니메이션 ‘심경’(2014)으로 지난 2015년 제1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시아 단편경선 우수상을 수상했다. 2015 미국 올버니 필름페스트 최고 단편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으로도 호평을 받았다. 이후 제1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트레일러 ‘여성은 좋은 영화를 만든다’를 제작했으며, 지난해 제34회 부산국제단편영화제와 제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 전 세계 영화제를 통해 두 번째 단편 ‘심심’을 선보였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상마당의 카페에서 김승희 감독을 만났다. 당일 유독 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김 감독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펴있었다. “오늘 진행하는 VIP시사회에서 최종 편집본을 보게 된다”는 그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유쾌한 매력과 자신만의 소신을 지닌 김 감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피의 연대기’ 영화 작업에 참여한 소감은 어땠나.

“저는 원래 혼자 작업했었고 그간 했던 작업들도 상업적인 게 아니었기 여성의 나체, 음모, 질을 그리는 데 전혀 제한이 없었다. 또 제가 그걸 좋아하기도 했다. 김보람 감독님은 여성의 몸을 그리는 제 방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시고 좋아해주셨다. 또 질 안의 모습이나 운동성을 캐릭터화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전달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여성의 몸을 이토록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건 정말 흔치 않은 기회였다. 일하면서 이번만큼 축복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영화 작업을 하며 페미니즘 이슈를 많이 접했을 것 같다. 원래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었나.

“학구적인 관심이 많은 건 아니었다. 다만, 어려서부터 집안에 여성이 더 많았고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 ‘너무 당연했던 것’들이 사회에 나가 남자들과 있을 때는 차단되는 느낌을 받았다. 20대 초반이었다. 페미니즘 수업을 듣고 ‘여자라서 짓눌리는 게’ 사회의 어떤 요소 때문인지 알게 됐다. 또 의문이 들었다. ‘여성의 월경이나 자위, 성기에 대해서는 왜 말하면 안 되지?’ 그런 억압들을 모두 느끼고 있었다. 근데 ‘피의 연대기’가 그 물꼬를 터주는 작업인 것 같았다. 그래서 ‘(김보람 감독이) 저 생리와 관련된 영화 만들고 싶어요’라고 했을 때 기분이 너무 좋았고 엄청 시원했다. 감독님의 설명을 듣고 ‘짱이에요, 최고예요!’라고 대답했다(웃음).

 

영화 ‘피의 연대기’ 애니메이션 스틸. 문명사회에 접어들어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로 탐폰을 만들었다. ⓒ김승희 감독
영화 ‘피의 연대기’ 애니메이션 스틸. 문명사회에 접어들어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로 탐폰을 만들었다. ⓒ김승희 감독

-여성의 몸이나 월경에 대한 이야기를 확장해서 차기작으로 만들 생각은 없나.

“안 그래도 보디(body) 이미지에 관심이 되게 많다. 특히 플러스사이즈모델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 그분들을 보면 시원함을 느낀다. ‘자신감이 새로운 예쁨이야’라는 얘기를 해주시는 것 같다. 요즘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는데, 쏟아지는 이미지의 물결 속에서 느낀 게 있다. 여성들이 ‘운동한 몸에 대한 코르셋’이 강해진 것 같다는 거다. 또 해외에 나갈 때마다 느끼는 건, 브래지어 사이즈가 A부터 G까지 정말 다양하다는 것. 근데 우리는 A 아니면 B가 전부다. C컵부터는 찾기가 힘들다. 여성의 몸은 정말 다양한데 (이상적인 몸매를) 하나로 규정지으려 하고, 여성들은 거기에 맞추지 못할 경우 상처를 받는다. 여성들에겐 그 상처가 평생 간다. 어릴 때 ‘보디 셰이밍(body shaming·공개적으로 상대방의 몸을 품평하는 것)’으로 갖게 된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세월이 흘러 몸매에 대한 코르셋을 갖게 된다. 저도 경험한 바가 있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너무 하고 싶다.”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감독님의 의식이 반영된 것 같다.

“맞다. 대부분 그림을 그릴 때 예쁘게들 그리는데, 저는 그것보다 좀 더 울퉁불퉁하게 그린다. 허벅지 살도 좀 더 붙어있고. 그런 몸을 그리면서 해방감을 느낀다.”

-애니메이션에는 본격적으로 언제 발을 들이게 됐나.

“대학을 다니다 자퇴했지만, 원래 전공은 순수미술이었다. 학교 다닐 때 제가 갖고 있는 심상들을 평면으로 표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설치미술이 맞는 것도 아니었다. 나한테 맞는 미디엄을 찾아야 했다. 그게 바로 애니메이션이었다. 2009년부터 한겨레문화센터에 다니며 애니메이션을 배웠다. 그때 선생님이 연상호 감독님이었다. 거기서는 기법을 배웠다기보다는 애니메이션을 만든 후 영화제에 출품하는 등의 전체 프로세스를 배웠다. 실제 애니메이션 제작은 방에서 혼자 부딪히며 해나갔다.”

 

영화 ‘피의 연대기’ 애니메이션 스틸. 하와이 원시 부족여성들은 양치식물로 탐폰을 만들었다. ⓒ김승희 감독
영화 ‘피의 연대기’ 애니메이션 스틸. 하와이 원시 부족여성들은 양치식물로 탐폰을 만들었다. ⓒ김승희 감독

-2014년 만든 ‘심경’이 첫 작품이다. 어떤 계기로 만들게 됐나.

“원래 제가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기 전에 우울증, 사회공포증이 있어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거의 6개월 가까이 방에만 있었다. 그러면서 저를 알아보려고 했다. 저는 제가 누군지 도저히 모르겠더라. 나 자신을 모르는데 어떻게 삶이 진행되겠는가. 그래서 일단 안에 있는 것들을 그냥 그리자고 생각했다. 혼자 부딪쳐가면서 만들어갔다. 만약 장대한 프로젝트에 임해야 한다고 했다면, 아마 부담감에 짓눌려 아무것도 완성 못했을 것 같다. 그냥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보자고 다독였다. 그때는 상처가 많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구체적인 상처를 서술하지는 않았지만 하나씩 하나씩 이미지로 꺼내서 던졌다. 그 작업이 저한테는 명상이 됐다. 싫어하는 제 자신, 상처받은 제 자신, 너무 연약한 제 자신을 치유하고, 앞으로 혹시나 비슷한 아픔을 겪으면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의 길을 조금씩 만들어가는 작업이었다.”

-감독님의 작품을 보고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심경’을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있다면?

“사실 이 작업을 할 때 관객에 대해 생각한 게 있다면 딱 하나다. ‘전 지구인이 몇 십억인데 그 중에 한 명 안 좋아하겠어?’ ‘누군가는 공명해서 좋아하겠지’라고 생각하며 만들었다. 저는 작업할 때 일단 저와 먼저 공명하지 않으면 남하고도 교감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업하는 순간의 자신에게 가장 집중한다. 그런데 ‘심경’을 만들고 영화제를 돌면서 해외에서 응원의 메일을 제법 받았다. 이 작품이 특정 사례를 얘기하진 않지만 여성분들에게는 과거의 경험을 건드리거나 뭔가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있었던 것 같다. 관객 중 한 분은 ‘네 작품은 아침마다 보고 싶어.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전투력을 줘’라는 말을 하더라. 제가 바로 그런 마음으로 만들었었다. ‘내 마음 안에 있는 것들과 부딪히고 싸우면서 이겨나가야지’라는 생각으로 만들었는데 그걸 비슷하게 느껴주니까 정말 감사하더라. 저한테는 그런 반응이 모두 선물이었다.”

-한국사회는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아직도 만연하다. 그래서 혼자서 아픔을 견디는 분들이 많은데, 그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저는 사회공포증이 지금도 있다. 지금 되게 많이 좋아졌는데, 여전히 힘든 것들이 있다. 근데 그 사실을 그냥 오픈한다. 또 오픈을 해보니 주변에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분들이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더라. 사실 이건 모두에게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근데 그게 왜 자꾸 함구돼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너무 안타깝다. 앞으로 저처럼 오픈할 수 있는 분들이 많아질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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