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생명권이 아닌

낙태죄를 수호하는 것일 뿐”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 지난해 9월 28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발족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참가자들이 연대의 의미를 다지는 붉은 리본을 들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 지난해 9월 28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발족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참가자들이 연대의 의미를 다지는 붉은 리본을 들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017년 후반, 천주교 주교회의는 낙태죄 폐지 반대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한다고 했다. “절박한 마음으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 서명운동을 펼친다”고. 익숙한 구도가 왠지 찜찜하다.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생명권을 주장하면서 낙태죄를 없애면 마치 인류가 생명에 대한 존엄을 포기하게 되는 듯이 굴고, 여성들이 생명 대 이기심의 싸움을 하는 것 처럼 구도를 그린다. 그렇지 않다고, 여성이 사는 삶의 현실에서 낙태죄가 무엇을 지키는지 봐달라고 그렇게 외치고 있는데도. 

임신에는 생명의 축복, 모성의 아름다움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이 이미지들은 여성의 경험을 단순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 고통받는 구체적인 실제를 가린다. 가족의 압력, 사회의 요구, 종교의 가르침이 압박을 가할 때 여성은 자신의 의사를 거스르면서도 “종의 노예 상태로 축소되어 재생산의 도구가 되는”(메리 데일리) 경험을 해야했다. 그러한 여성들에게 피임과 낙태기술의 발달은 해방의 가능성이자 원하지 않는 출산과 모성의 반복을 끊어버리고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출구였는 데도, 교회는 여성들을 막아서며 그들을 집 안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여성의 삶보다 태아의 생명권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교회가 여성을 “생식기능에 노예화시키도록”(시몬느 드 보부아르) 공모한 셈이다. 

피임과 임신, 낙태나 출산은 여성의 몸과 건강에 깊게 연관되어 일어나는 일들이다. 레슬리 도열에 따르면, 미국에서 낙태가 합법화되자 낙태로 인한 모성 사망률이 10만명 당 30명(1970년)에서 5명(1976년)으로 감소했고, 1984년에 낙태를 불법화한 루마니아에서는 모성사망률이 21명(1965년)에서 128명(1984년)으로 증가했다. 범죄시 하는 것은 낙태를 억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많은 여성이 ‘유지할 수 없고 보호받지 못하는 임신을 끝내려고 시도하면서 스스로 건강을 해치게 된다’는 것이다. 

생명권 이야기도 해보자. 생명권이란 태어나는 순간만 보장받으면 되는 권리인가? “생명권은 단지 태어나고 죽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전 과정’을 통해 보장되어야 할 권리”(나영)이다. 쉽게 말해 사는 동안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권리가 생명권이다. 그런데 여성이 자신의 생명과 삶이 직결된 “성관계, 임신, 임신중지, 출산에 대해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요구받거나, 임신중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안전한 시술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이는 여성의 행복추구권, 자기결정권에 대한 침해일 뿐 아니라”, “인격권, 생명권에 대한 침해이기도”(나영)하다. 생명권을 존중한다면, 무엇보다 여성의 생명권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법체계는 이미 배아, 태아, 영아, 사람을 구분해서 보호하고 각각 다르게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사람에게 적용되는 상해죄, 과실치사상죄는 태아에게 적용되지 않고, 배아에 대한 형량은 태아보다 높다. 지금의 법체계는 “독립된 하나의 개채로서 법적 인격권과 생명권이 인정되는 시기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고 있으며, 특히 배아의 이용이나 태아의 구체적인 사법적 권리와 연결될 때는 생명의 절대적 존엄성보다는 현실적 조건들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나영)다. 무엇보다 국가는 모자보건법상으로 24주 이내 인공임신중절 수술이 가능한 경우를 정해놓았는데, 이 과정에서 생명은 우생학적 목적과 인구관리를 위해 사실상 ‘선별’되고 있다. 나영에 따르면 낙태죄는 여성을 태아의 생명과 대척점에 있는 듯 둠으로써, 국가가 인구관리를 목적으로 언제든 여성을 통제할 수 있도록 유지하는 것이며- 태아와 모체의 관계성을 분리시키고 생명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결정권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는 이제 “왜, 어떤 생명이 무슨 기준으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가”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미 생명이 선별되고 있고 여기에 국가와 의료, 과학기술이 개입하고 있는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교회는 낙태죄를 지지함으로써 스스로 ‘수호한다고 믿고 있던’ 생명권을 지킨 게 아니다. 국가가 이미 법체계를 이용해 생명을 선별하고 있으면서도, 이 구도를 가리고 여성의 임신 중지에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낙태죄를 수호했을 뿐이다. 낙태죄가 배우자에게 임신중단 수술의 동의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쥐어주고, 책임은 묻지 않은 채 여성만을 독박처벌 하고 있다는 점은 그래서 매우 상징적이다. 이제 교회는 더이상 국가가 자기의 모순을 숨기고 여성만을 희생양 삼도록 작동하고 있는 낙태죄에 협력해서는 안되며- 여성들이 생명 대 결정권의 구도가 아니라 불평등하게 기울어진 사회를 상대로 스스로의 생명권을 걸고 싸우고 있다는 점을 들어 낙태죄 폐지에 동참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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