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폐지를 위해 결성된 연대체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 지난해 12월
 2일 서울 광화문 세종로 공원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위한 2017 검은 시위 ‘그러니까 낙태죄 폐지’를 열고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낙태죄 폐지를 위해 결성된 연대체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 지난해 12월 2일 서울 광화문 세종로 공원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위한 2017 검은 시위 ‘그러니까 낙태죄 폐지’를 열고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결혼 전부터 일을 하고 있던 저는 결혼과 동시에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면서 직장인인 동시에 가정주부이자 아이 양육자의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누구나 쉽게 다하는 임신과 출산인 것처럼, 결혼과 출산이 의무인 것처럼 사회 속에서 세뇌되어 왔습니다.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도 제도도 너무나 빈약했습니다. 임신하는 동안 하혈, 임신성 당뇨, 아이 태동의 문제로 임신 내내 힘든 날을 보내고 양수가 터져 제왕절개수술까지 해야 했습니다 … 밤에도 아기에게 2시간마다 수유를 하려면 산모가 밤에 수면이 지속되는 시간은 길어야 한 시간정도입니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체력과 지속되는 수면부족은 산후우울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놀아주고 집안 청소에 빨래에 하루 종일 반복되는 일을 하는 동안 저의 끼니는 서서 잠깐 때우거나 패스트푸드로 대신 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사회에서는 당연하게 엄마의 의무라고 소리높이며 맘충이라는 단어로 손가락질을 합니다 … 턱없이 모자란 양육비에 자아실현이든 뭐든 상관없이 당장 돈을 벌이가 필요한 저는 휴직이 끝나고 직장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직장에 복귀했을 때 아이가 아플 때 누가 돌보아줄 지, 야근이 생기는 날, 출퇴근시간이 안 맞을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끊임없이 육아에 대한 고민이 직장 복귀 준비보다 앞서있습니다. 그런 여성을 직장에서 반길 리도 없습니다. 육아로 인해 돌아갈 직장이 없는 여성도 다수이며 전업주부의 입장이라고 호락호락 하지도 않습니다.” (지난해 9월 28일,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발족 기자회견 발언 중 일부)

한국 사회에서 임신과 출산, 육아가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이나 결정을 할 수 있는 문제였던 적이 있을까? 임신과 출산, 육아로 휴직을 한 여성의 경험에 관한 이야기는 ‘산모’, ‘어머니’로 호명되는 여성들에게 자기결정권은 사실상 발휘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임신과 출산, 육아 및 돌봄에 관한 권리를 실행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성들은 일차적인 책임을 떠안은 채 강요된, 제한된 선택을 하도록 내몰리고, 그 결과에 따른 비난과 책임 역시 떠안고 있다.

혹자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 그렇게 가정을 꾸리는 것이 ‘평범한’ 삶이라고 한다. ‘건강가정기본법’ 상에도 가정은 가족구성원이 생계 또는 주거를 함께 하는 생활공동체로서 가족-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구성원에 대한 부양·양육·보호·교육 등의 기능을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평범한’ 삶, ‘건강’가정이 상정하는 혼인, 임신, 출산, 양육은 무엇인가. 

한국 사회에서 임신과 출산, 양육은 책임 방기와 전가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개인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보호·지원을 국가나 사회 차원에서 마련하기보다는 가족에게 책임을 지워왔다. 가족을 이분법적이고 생물학적인 성에 입각한 남녀의 혼인과 출산으로 구성된 ‘정상가족’으로 전제하고, ‘남성-생계부양자, 여성-돌봄노동자’라는 가족 내 성별분업을 정상화하면서 가족 내 돌봄노동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해왔다. 임신과 출산, 육아는 개인의 선택이나 결정, 권리의 문제이기보다 여성과 가족의 당위적인 과업이자 의무로 여겨졌고, ‘모성’이란 이름으로 여성의 ‘자연스러운 역할’로 간주되면서 국가나 사회는 의무를 다하지 못한 여성을 비난하고 단죄해왔다.

이러한 가족과 성역할을 둘러싼 정상성 규범은 변화하는 가족의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음에도 여전히 공고하게 작동하며, 가족과 노동시장 안에서 성차별을 존속시키고 있다. 여성에게 돌봄책임을 떠넘기면서 돌봄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여성의 가족 내 돌봄노동은 그림자 노동이 되고, 노동시장에서 여성은 2차적 노동자로 간주되며 임신,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과 저임금의 불안정한 노동에 머무르게 된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임신, 출산, 양육은 여전히 제한된 선택지 속에서 삶의 기본적인 권리들을 포기해야 하는, 어떤 결정을 하든 사회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여성들의 상황은 태아 및 아동의 권리와 대치되거나 분리해서 볼 수 없으며, 최근의 ‘노키즈 존’, ‘맘충’ 논란에서도 드러나듯이 임신과 출산, 양육을 둘러싼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강할수록 아동의 권리는 보장받을 수 없다. 

임신, 출산, 양육의 경험은 결코 연속적이지도, 단일하지도, 당연하지도 않다. 그것은 개인의 과업이나 의무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이며, 성과 재생산의 권리, 건강권, 돌봄권, 가족구성권, 안전권, 노동권 등 일련의 권리들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동안 정부는 임신과 출산, 양육의 문제에 대해 “덮어놓고 나으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고 했다가 “아파트 줄게, 애 셋 낳아라”는 식의 인구정책의 수단으로 주요하게 접근해왔다.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얄팍한 유인책으로 ‘출산 억제’ 혹은 ‘출산 장려’ 정책을 펼칠 것이 아니라 차별이나 배제, 강압과 폭력 없이 임신, 출산, 양육에 관한 권리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도록 제도적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성별, 장애, 질병, 연령, 경제적 상황, 지역적 조건, 혼인 여부, 교육 수준, 가족 상태, 국적, 이주상태, 성적지향 등에 따른 복합적인 차별과 다양한 필요에 대응해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성평등과 인권의 관점에 입각해 포괄적이면서 개인 또는 집단의 특성을 고려한 접근이 중요하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저출산이 진정 ‘국가적 위기’라면, 여성들이 ‘출산의 도구’, ‘돌봄 전담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존엄과 권리를 가진 존재라는 그 ‘정의(正義)’에서부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여성의 삶과 몸에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덧씌우며 낙인을 찍고 책임을 전가하는 법과 정책, 관행부터 폐지해야 하며, 그것의 시작은 형법상 낙태죄를 폐지하고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모두가 임신과 출산, 양육에 관한 자유롭고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낙태죄는 폐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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