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 = 동성애’ 논리는

극우의 정치적 저항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

보수·진보 함께 대응해야

 

 

 “성평등 NO, 양성평등 YES, 동성애 반대, 동성애 교육 조장하는 여성가족부 폐지, 성평등? 게이, 레즈비언, 트젠스젠더 평등!”. ‘양성평등정책 바로세우기’를 주장하는 여러 단체의 집회에서 볼 수 있는 표어다. 그런데 왜 여성이 경험하는 차별에 전혀 관심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요즘 양성평등을 입에 담기 시작했을까?

양성평등보다 성평등이 성소수자를 포함하는 개념은 분명하다. 성평등의 의미는 포괄적이다. 남성과 여성만의 존재에 근거하여 남녀 간 대립을 전제하는 양성평등은 그에 반해 협소하다. ‘게이, 레즈비언, 트렌스젠더’ 뿐 아니라 최근 독일에서 법적으로 인정하기로 한 ‘제3의 성’ 개념도 포함하지 못하는 것이 양성평등이다. 그래서 양성평등은 대립적 개념일 뿐 아니라, 사회적 변화도 반영하지 못하는 개념이다. 이렇게 볼 때 성평등은 양성평등보다 앞서 나간 진보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양성평등 개념은 보수적인가?

노동시장 성차별, 여성에 대한 구조적 폭력, 독박육아 등이 일상인 한국사회 현실에서 양성이 진정 평등한 상태가 된다면 이건 어마어마한 진보다. 반면 성평등을 동성애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양성평등은 아마도 ‘남성은 바깥에 나가서 돈 버는 일을, 여성은 집안에서 가사와 돌봄을 제대로 하는 상황’일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아무리 ‘양성평등 YES’를 외치더라도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장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폭력성, 미움과 차별, 그리고 배제의 수준을 보니 이건 보수가 아니라 극우라는 판단까지 하게 된다.

결국 양성평등은 성평등으로 나가는 과정에 있는 개념이다. 양성평등은 또한 성별역할분리의 공정성을 받아들이는 보수적 개념에서 (남녀 일·가정 양립 개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성별역할분리를 극복하는 진보적 개념으로 그 스펙트럼이 이어진다. ‘보수적 양성평등 → 진보적 양성평등 → 성평등’으로 역사적 과정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사회 흐름은 진보적 양성평등 자체를 향해 법·제도가 바뀌고 구성원의 의식이 바뀌어 가는 상황에 있다. 성평등은 사회변화의 지향점으로서 의미있게 제시되고 있지만 성평등의 모든 가치가 당장 법제화·정책화될 가능성은 없다. 예를 들어, 양성평등기본법이 성평등기본법으로 개정된다고 해서 동성혼 인정 등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정치와 정책은 다수 여론을 반영하여 변화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실천하겠다고 한 성평등이 동성혼 법제화는 분명 아닐 것이다. 지금 법제화·정책화가 가능한 것은 진보적 양성평등이다. 여당도 알고 야당도 안다. 그런데 왜 ‘성평등 = 동성애’인가? 빨갱이·종북몰이라는 배제와 차별, 미움을 앞세워 성장해온 극우 세력이 새로운 먹잇감을 원하기 때문이다. 극우가 두려워하는 진보적 변화의 물결을 막을 수 있는 둑으로서 ‘성평등 = 동성애’를 발견한 것이다.

극우 나치 히틀러 정권이 같은 생각을 가졌다. 동성애를 묵인하면 점점 퍼져서 독일사회가 병들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1872년 만들어졌던 동성애 처벌 형법 조항을 더욱 강화하였다. 수만 명의 동성애 성향 독일 남성이 구금됐고 그 중 수천 명은 수용소에서 죽어 나갔다. 히틀러 시대처럼 혹독하지는 않았지만, 1950년부터 1965년까지 서독에서만 4만5천명의 동성애 성향 남성이 형법 175조에 근거해 처벌받았다. 1969년 21세 이상 성인의 경우 처벌을 면하는 형법 개정이 있었고 1973년에는 해당 연령이 18세로 낮춰졌다. 1994년 3월 형법 175조가 삭제됨으로써 동성애는 더 이상 처벌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동성애자 수가 늘어나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개인의 선택과 인권을 존중하고 아무리 소수집단일지라도 배제와 폭력으로써 대하지 않는 민주주의 제도가 성숙됐기 때문이다. 독일은 비슷한 경로를 겪은 서유럽과 북미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반면 민주주의 발전이 요원한 국가에서는 다른 경향을 볼 수 있다. 푸틴 독재 시대로 회귀 중인 러시아는 2013년 동성애를 불법화하면서 최고 2만5000유로 벌금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간다에서는 2014년 법 제정을 통해 반복적 동성애 적발시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란, 예멘,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나이지리아, 소말리아 등 국가에서 동성애는 최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는 범죄 행위다. 이들 국가에서 동성애가 만연하여 처벌을 강화하는 것일까? 민주주의 발전의 싹을 자를 수 있는 좋은 수단이 성소수자 탄압이기 때문이다.

다수 사회구성원은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기 때문에 무관심하게 넘어가는 문제가 결국 해당 사회의 보편적 인권이라는 가치를 훼손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독일에서 연간 70여만 명의 신생아 중 불과 200명이 채 안되게 남성 혹은 여성을 결정할 수 없는 아이들이 태어난다. 이렇게 ‘제3의 성’을 가진 아이들이 그러한 성적 정체성 그대로를 갖고 살 수 있도록 법 개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소수집단의 인권일수록 더욱 소중히 존중하는 가치가 결국 나치가 훼손하려했던 민주주의를 지키는 수단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성평등 = 동성애’ 논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대다수 사회구성원의 무관심을 틈타 허무맹랑한 논리로써 성소수자를 배척하는 이들의 진짜 관심은 합리적 토론과 경쟁에 기초한 민주화 노력을 무산시키는 것이다. 성평등을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지향점으로 선언해야 한다. 다만 대중여론과 법제화ㆍ정책화 가능성을 감안하여 진보적 양성평등정책을 우선 추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성평등 = 동성애’는 여성가족부 장관을 끌어내리려는 시도가 아니다.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적폐청산을 거부하며 민주화의 물결을 막으려는 극우의 정치적 저항이다. 극우가 아니라면 보수와 진보 모두가 나서서 대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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