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대법서 승소한 르노삼성 성희롱 사건 피해자 A씨

2013년 성희롱 피해 공론화

조력자도 불이익 조치한 회사

대법원 판결까지 4년 6개월

꿋꿋하게 회사 다니며 재판

소송·회사 그만두고 싶었지만

“나도 당했다”는 피해자들의

연락에 끝까지 소송 진행했다

 

르노삼성자동차 여직원 성희롱 사건의 피해자(사진 오른쪽)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차혜령 변호사가 12월 22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회사의 책임을 모두 인정하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을 받은 뒤 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르노삼성자동차 여직원 성희롱 사건의 피해자(사진 오른쪽)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차혜령 변호사가 12월 22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회사의 책임을 모두 인정하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을 받은 뒤 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를 도운 직원에 대해서도 회사가 불리한 조치를 해선 안된다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재판부는 12월 22일 르노삼성자동차가 피해자 A씨와 그를 도와준 동료에게 내렸던 징계처분이 불법행위에 해당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했다.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불이익 조치만이 아니라 조력자(동료)에 대한 불이익 조치 역시 직장 내 성희롱을 문제제기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드는 행위라는 점을 인정한 판결이라 이번 판결을 환영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이자 4년 6개월 간 회사를 다니며 포기하지 않고 재판을 진행해온 A씨가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의미 있는 판결이다.

대법원 판결이 있던 12월 22일 판사의 선고가 끝나는 순간 A씨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소송을 진행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차혜령 변호사,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 등 수년 째 그를 곁에서 도운 이들의 손을 붙잡고 법정 밖으로 나왔다. 성희롱 피해 사실을 회사에 알린 뒤에도 5년째 같은 회사를 다니는 그를 강단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법정에서 실제로 만난 A씨는 대범함이나 용감함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판결을 앞두고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쟁점이 되는 부분 모두 질 것으로 예상했다면서 울먹였다.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이 조직 내에서 얼마나 복잡하게 전개되고 해결하기 힘든 문제인가는 피고가 누군지 보면 짐작할 수 있다. A씨의 소송도 마찬가지다. 1심에선 성희롱 가해자와 회사 내에서 자신에 대해 악의적인 소문을 낸 인사팀 직원, 퇴사를 종용한 임원 그리고 대기발령 등 수차례 징계를 내린 회사가 피고에 포함됐다. 이후 항소심부터는 회사를 상대로 싸웠다.

게다가 사건과 무관한 이들도 소송을 결심하는데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됐다. A씨는 “회사에 입사해 줄곧 10여년을 근무하다보니 주변 지인들이 대부분 회사와 연관된 사람들이다. 그들이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나를) ‘꽃뱀’ 취급할 것을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A씨는 사비를 털어 힘겨운 싸움을 시작했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승산이 없다는 얘기를 믿고 싶지 않았지만 실제로 1심에선 성희롱 가해자의 손해배상책임만 인정하는 판결이 났을 뿐, 회사 측의 문제는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

직장 성희롱 2차 피해는 피해자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를 도와준 동료까지 근태 문제를 핑계로 억울한 징계를 받아야 했다. 다른 동료들은 그들의 억울함을 모른 체 했다. 피해자는 “12월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으로 대기발령 났는데 아무도 관여하지 않고 ‘괜찮으냐’는 말도 안하더라. 그 방에 갇혀 울었다”고 말했다.

“소송도 회사도 그만두고 싶다고 늘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저를 도와준 사람(조력자)도 엮여버린 상황에서 이제는 마음대로 포기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이길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버티는 수밖에 없었어요.”

소송을 견디면서 회사를 다녀야 할 당위성도 깨닫게 됐다. “성희롱 피해자가 신고하면 다 그만두는데 그 회사에서 정년퇴직하는 선례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제 소송이 알려지면서 비슷한 사건을 당한 사람들에게 연락이 오더라고요. 상사가 찝쩍대는데 회사에 신고해도 되는지, 회사에서 불이익조치 당하고 있는데 고소해도 되는지 묻는 연락이요. 저처럼 겁 많은 사람들이었어요. ‘한샘 사건’에선 피해자 한 명이 3번이나 성폭행을 당하고도 조용히 넘어갈 뻔했는데, 성희롱 정도는 비일비재하지 않을까요?”

A씨는 이번 판결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고, 돈을 바라는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단지 그의 희망사항은 고용노동부의 변화다.

“근로자가 회사에서 퇴직금을 못 받아 고용노동부에 신고하면 2개월 만에 받아주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성희롱 피해자의 신고도 이렇게 신속하게 처리돼서 2차 피해를 줄이는데 정부가 앞장섰으면 좋겠습니다.”

A씨는 “모두가 꽃뱀이라고, 회사 얼굴에 먹칠한다고 손가락질 할 때 끝까지 믿고 지지해 준 한국여성민우회를 비롯한 공동대책위원회와 민변 여성인권위원회 이종희 변호사를 비롯한 대리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한편, 실제로 A씨처럼 직장에서 성희롱 피해를 입고 관계기관에 신고를 한 뒤에도 해당 회사에 계속 근무하는 피해자는 많지 않다. 2016년 서울여성노동자회 고용평등상담실 조사를 보면 피해자 가운데 불과 28%만이 회사를 다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 제기한 사람을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고 업무상 부당한 인사발령이나 괴롭힘 등 2차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도 많아 사실상 사직을 강요당하고 있다.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제기한 자에 대한 불리한 조치는 남녀고용평등법 제14조 제2항에서 금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이익조치가 시정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실제로 2012년부터 2016까지년 고용노동부는 남고용평등법 제14조 제2항 위반으로 접수된 사건 26건 가운데 단 2건(기소율 7.7%)만 기소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논평을 통해 “그동안 법적 인정이 협소하게 이뤄져 피해자들은 성희롱 피해를 입었음에도 쉽게 문제제기 하지 못하거나, 불이익 조치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져왔다”며 “그 결과는 직장 내 성희롱을 고발할 수 없는 사회, 문제 시정이 요원한 사회”라고 꼬집었다. 이어 ”이번 판결이 직장 내 성희롱을 문제제기했지만 오히려 사측으로부터 불이익한 조치를 받고 있는 모든 피해자와 조력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는 시작점이 되기를 바란다“며 ”모든 사업주가 성평등한 노동환경을 만들어야 할 적극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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