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웃고 울린 ‘그레잇&스튜핏’ 콘텐츠

 

올 한 해도 다양한 콘텐츠가 우리를 웃고 울렸다. 때로는 극렬한 분노를 일게 만들기도 했다. 한쪽은 여성의 목소리를 온전히 담아냈고, 여성이 겪는 일상적 성차별을 이야기해 무한 공감을 이끌어냈다. 반면 다른 한쪽은 여전히 구시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지독한 여성혐오를 보여줬다. 여성을 범죄 대상으로 한정시켜 묘사하거나 성적 대상화해 ‘눈요기용’으로 소비하는 데 그쳤다. 올해는 페미니즘의 물결이 넘실대며 여성들의 ‘말하기’가 어느 때보다 돋보인 해였다. 물결은 점점 더 커질 것이고, 대중문화 콘텐츠에 성평등이 담겨야 한다는 요구도 높아질 것이다. 내년에는 많은 이들의 바람대로 페미니즘 콘텐츠가 줄지어 탄생하길 바란다. 2017년을 정리하며 <여성신문>이 꼽은 ‘올해의 그레잇&스튜핏 콘텐츠’를 소개한다. 

<그레잇 콘텐츠>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스틸컷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스틸컷

“이 영화로 한국영화는 비로소 ‘위안부’ 피해자를 재현할 자격이 생겼다.” 박우성 영화평론가의 말대로 ‘아이 캔 스피크’는 확실히 달랐다. 가학적 이미지를 전시하지 않으면서도 웃음과 감동, 위로를 전했다. 또한 피해자들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지 않고 상처를 보듬었다는 평을 받았다. 김현석 감독은 언론시사회 당시 “아픔 때문에 부러 위안부 문제에 깊이 관심 갖지 않은 나를 포함한 우리들의 시선을 강조하고자 했다”며 “‘아이 캔 스피크’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조금은 비틀어 접근하길 바랐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배우 나문희는 위안부 피해자 나옥분 역을 맡아 자신만의 호흡으로 온전히 소화해냈고, 그를 받쳐준 이제훈의 연기도 훌륭했다. 왠지 우리 주변에 꼭 한 명쯤 있을 법한 평범한 할머니인 옥분은 온 동네 여기저기 관심을 쏟으며 민원을 넣어대는 탓에 ‘도깨비 할매’로 불린다. 그러나 실상 그 안에는 말 못할 한과 외로움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다 민재(이제훈)를 비롯한 주변인과 관계를 맺고, 자신을 드러내고, 세상을 향해 말을 걸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영화는 그의 이야기를 소란스럽지 않으면서도 묵직하게 담아냈다. 그리고 알렸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말할 힘이 있고, 우리는 그들의 말을 전할 것이라고. 나문희는 ‘아이 캔 스피크’로 올해 청룡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이같은 소감을 전했다. “나의 친구 할머니들, 제가 이렇게 상을 받았어요. 여러분도 그 자리에서 다들 상 받으시길 바랍니다.”

 

KBS2 드라마 ‘마녀의 법정’에서 검사 마이듬 역을 연기한 배우 정려원 ⓒKBS2TV
KBS2 드라마 ‘마녀의 법정’에서 검사 마이듬 역을 연기한 배우 정려원 ⓒKBS2TV

[드라마] KBS2 마녀의 법정

여성·아동 대상 성범죄를 다룬 최초의 드라마로 화제를 모았다. 성범죄로 인해 여성이 어떤 고통을 받고, 왜곡된 사회 통념이 피해자를 어떻게 가해하는지 잘 보여줬다. 여성이 중심이 된 법정 드라마라는 점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그간 여성에게 수동적이고 보조적 역할만 주던 장르물의 젠더 공식을 깼다는 평이다. 특히 배우 정려원이 연기한 7년차 검사 마이듬은 법정에서 승리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출세 지향적인 인물이다. ‘이겨야 정의가 된다’는 신념을 가졌으며, 승소를 위해서라면 증거조작이나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여성 검사는 대개 정의에 넘치거나 따뜻한 감성을 지닌 것과 대조된다. 드라마 종영 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정려원은 “수동적인 여자 역할보다는 막 돌아다니고 사건이 휘말리는 캐릭터가 좋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마녀의 법정’은 찰떡 같이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이번 드라마는 여성가족부가 제작 지원에 나섰다는 점도 눈여겨볼만한 대목이었다. “대중문화 콘텐츠를 통해 반성폭력”을 이야기한 점은 박수 받아 마땅했다. 재미도 놓치지 않았다. 방영 시작 2주 만에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해 종영 때까지 유지했다. 작품성과 대중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으니 올해의 드라마라 할만하다.

 

웹툰 ‘며느라기’ ⓒ며느라기 페이스북 www.facebook.com/min4rin
웹툰 ‘며느라기’ ⓒ며느라기 페이스북 www.facebook.com/min4rin

[웹툰] 며느라기

결혼 후 며느리가 된 여성이 겪는 성차별과 불합리함을 섬세한 관찰력으로 그려냈다. “에이, 그게 무슨 차별이야?”라는 반박에 부딪힐까 그간 여성들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시댁 내에서의 불평등’을 만화로 쉽게 풀었다. 여성들에게는 분노를 동반한 극렬한 공감을 이끌어냈으며, 남성에게는 여성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기존의 웹툰 플랫폼이 아닌 작가 개인의 SNS를 통해 독자에게 직접 다가갔다는 점도 색다른 요소로 작용했다. 며느라기는 단순한 웹툰을 넘어선지 오래다. 한국사회 내 공고한 가부장제를 드러내는 고발의 목소리가 담겨있음을 많은 이들은 눈치 챘을 것이다. 주인공 민사린의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우리사회에서 며느리라는 존재가 갖는 위치와 그 역할을 자각한 사린은 앞으로 어떻게 상황을 헤쳐 나갈까. 사린은 ‘며느라기’를 끝내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의 남편 무구영은 과연 자기 안의 가부장성을 깨닫고 변화할 수 있을까?

 

[도서]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

올 한 해 가장 ‘핫’했던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간 14개월 만에 50만부를 판매했고, 올 한 해만 ‘오늘의 작가상’, ‘양성평등문화상’, ‘한국서점조합연합회 선정 올해의 책’ 등에 선정됐다. 지난해 10월 조남주 작가가 출간한 이 책은 한국 여성의 삶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해 올해 초부터 여성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탔다. “결정적인 순간이면 ‘여자’라는 꼬리표가 슬그머니 튀어나와 시선을 가리고, 뻗은 손을 붙잡고, 발걸음을 돌려놓았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일상에서 숨 쉬듯 경험하는 차별과 억압을 고스란히 담았다.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1982년생 김지영씨의 삶을 통해 여성들이 겪는 일상적 차별과 구조적 불평등을 그렸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누구든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어 내려갈 수 있다. 책에 대한 관심은 정치권으로까지 확산됐고 전국적으로 ‘김지영’ 바람이 불었다. 조 작가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책에 열광한 이유로 ‘공감’을 꼽았다. “가끔 독자 분들을 만나면 자신의 이야기나 어머니, 언니 혹은 누나, 아내, 여자친구의 이야기를 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말하고 싶었지만 사소해서, 당연해서, 말하면 문제가 될까봐 말하지 못했던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를 꺼내는 계기가 됐던 것 아닐까요.” 조 작가의 말이다. 

<스튜핏 콘텐츠>

[영화] 브이아이피(V.I.P)

 

올해 최악의 영화 중 하나로 꼽을만하다. 감독은 장동건, 김명민, 이종석, 박희순 등 스타배우들을 대거 기용해 흥행에 나서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그간 여성 관객들이 비판했던 지점이 ‘브이아이피’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극중 김광일(이종석)이란 인물은 북한에서 온 연쇄살인범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고문·강간·살인을 벌이는 안티소셜(antisocial·반사회적인)한 캐릭터다. 영화는 김광일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이야기하기 위해 여성을 도구로 이용했다. 영화 서사 안에서 여성은 성적 착취를 당하거나 살해당할 뿐이다. 실제로 포털사이트에 공개된 영화 소개란에는 대부분의 여성 인물 이름이 ‘여자시체’로 기재돼 있었다. 카메라는 여성이 강간·살해당하는 모습을 불필요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담아냈고, 당시 관객 중 일부는 영화를 본 후 “영화관에서 부들부들 떨다가 밖으로 나가 헛구역질하고 들어갔다”며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SBS 드라마 ‘우리 갑순이;에서 갑돌(송재림)이 갑순(김소은)의 팔뚝을 거칠게 잡아끌고 있다. ⓒSBS
SBS 드라마 ‘우리 갑순이;에서 갑돌(송재림)이 갑순(김소은)의 팔뚝을 거칠게 잡아끌고 있다. ⓒSBS

[드라마] 로맨스포 포장한 드라마 속 폭력

올해도 한국드라마에서는 사랑으로 포장한 폭력이 여지없이 등장했다. 여자의 몸에 멋대로 손을 대거나 벽으로 밀쳐 억지로 키스를 하거나 심지어 강간 미수까지. 특히 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지난 11월 10일 2회차 방영분에서 성폭행 미수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극중에서 조감독으로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는 드라마 보조 작가 윤지호(정소민)에게 강제로 성관계를 시도한다. 남자의 힘에 눌려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지호의 모습은 스크린에 여과 없이 담겼다. 지난해 8월부터 올해 4월까지 방영한 SBS 주말드라마 ‘우리 갑순이’는 방영 초 데이트 폭력 장면을 적나라하게 담아내 비판을 받았다. 눈치 없고 철없는 허갑돌(송재림)에게 지칠 대로 지친 신갑순(김소은)은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이별 통보를 받아들지이지 못한 갑돌은 갑순의 팔뚝을 거칠게 잡아끌어 벽으로 밀친다. 그러고는 “싫다”며 거부하는 갑순의 팔을 억지로 붙들어 맨 후 키스를 퍼붓는다. 현실에서 일어났다면 명백한 성폭력이 됐을 사건이 드라마에서는 애절하고 눈물겨운 장면으로 묘사된 것이다. 이밖에도 올해 드라마에서 묘사된 폭력과 막말은 셀 수 없을 정도다. 내년에는 ‘스튜핏’ 대신 ‘그레잇’한 장면에 웃음 짓길 바란다.  

 

[웹툰] 뷰티풀 군바리

2015년 연재를 시작한 네이버웹툰 ‘뷰티풀 군바리’(이하 군바리)는 여자도 군대에 간다는 설정으로 많은 남성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현재도 군바리는 네이버웹툰 월요일 코너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며 인기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군바리는 작품 설정과는 무관하게 여성의 신체를 기형적으로 강조하고 불필요한 노출 장면을 과다하게 등장시켜 연재 초부터 여성을 ‘성 상품화’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여성 군인이라는 특정 직군을 성적 대상화 한다는 지적도 많았다. 특히 전체 연령을 대상으로 함에도 강간 포르노에 나올 법한 장면들을 수시로 재현해 논란이 됐다. 이에 지난 8월 SNS에서는 ‘#뷰티풀군바리_연재중단’ 운동이 일었으며, 연재 중단을 요청하는 서명운동에는 3만여명 이상이 동참했다. 트위터 등 SNS에서는 “만화에 포르노 코드를 교묘하게 끼워 넣어 포르노와 비포르노의 경계를 무너뜨린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현재 군바리는 휴재에 들어갔다. 내년 1월 다시 돌아온다. 이에 한 누리꾼은 지적했다. “뷰티풀군바리는 내년 1월 2부를 시작한다. 여성을 멸시하는 콘텐츠가 계속해서 굴러갈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jhzo***)

 

[도서] 성범죄 사건 경찰조사에서 합의, 재판까지 사건별 시간별 대응 전략(지식공간, 2015)

성범죄 사건 가해자가 경찰조사, 재판 등에 대응하는 전략을 모아놓은 책이다. 한 마디로 ‘변호사가 알려주는 성범죄 사건 대응 전략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인 박원경 변호사는 “받지 않아도 될 혐의는 받지 말고, 받지 않아도 될 처벌은 받지 말자”며 이제 우리 사회가 피의자의 인권에 대해서도 돌아볼 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가족이나 직장에 (나의 성범죄가)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면’ ‘목표 잡기-무혐의 혹은 무죄 주장하기’ ‘성매매 미수는 죄가 아니다’ ‘불이익 최소화 전략-합의를 중심으로’ ‘성관계가 아닌 애무만 받아도 성매매인가’ ‘청소년 성매수로 법정에 섰다면’ 등에 대한 대응책을 소개한다. 온라인 리뷰에는 “훗날 사람들에게 성범죄 피해자 인권을 비롯한 여성인권이 얼마나 바닥을 쳤었는지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될 책” 등의 비판이 줄을 잇는다. 한국은 성폭력 무고에 대한 공식 집계조차 없는 실정이다. 학계에선 무고 건수를 2% 정도로 보고 있다. 남성들이 부르짖는 ‘꽃뱀’의 실체가 허상에 가까운 이유다. 이러한 실정에서 성범죄 피의자를 ‘돕기 위한’ 책이 출간되다니, 통탄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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