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만 사용되는

정체불명의 ‘양성평등’

성적 지향은 개인의 권리

페미니즘의 출발은

‘을의 위치’에 서는 것

성소수자 외면 안돼

 

 

해외 언론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핵 문제로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여성가족부 역시 위태롭기는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얼마 전 ‘제2차 양성평등기본계획’ 공청회가 소동으로 시작해 거의 폭력 사태 직전까지 간 것은 물론, 지금도 청사 앞에서 연일 성평등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니 말이다. 여성신문 독자라면 이 사태가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동시에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사건인지 짐작하실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라 함은 그동안 잘못돼온 것을 바로잡는 지극히 정당한 조치에 대해 전혀 초점이 빗나간 왜곡된 해석을 덧붙여 막무가내식의 소동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가족부의 영문 명칭 ‘Ministry of Gender Equality’를 정확히 번역하면 ‘성평등부’다. 여기서 ‘성’이란 젠더(gender), 즉 인간을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범주로 구분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역할과 기회, 자원을 차별적으로 배분함으로써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재생산하는 젠더체제(gender regime)를 가리킨다. 따라서 성평등부란 불평등한 젠더체제를 바로잡는 임무를 부여받은 정부의 부서이며, 성평등정책은 불평등한 젠더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정책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가족부의 정책은 양성평등정책이 아니라 성평등정책으로 불려야 한다. ‘양성평등’이란 말은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정체불명의 단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에서 ‘여성발전기본법’은 ‘양성평등기본법’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당시 ‘성평등기본법’이 맞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성평등’은 진보적 야당의, ‘양성평등’은 보수 여당의 구호로 양분되면서 정권을 쥔 보수 여당의 이름표가 선택됐다. 이 과정에서 성평등을 공격하는 측은 성평등의 ‘성’을 젠더가 아니라 섹슈얼리티(sexuality)로, 성평등을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의 평등이라고 주장했다. 명백히 잘못된 해석이다. ‘양성평등기본법’이나 ‘양성평등기본계획’의 어디에도 성적 지향과 관련된 내용은 없다. 이런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는 분도 적지 않겠지만, 적어도 사정은 그렇다.

따라서 여성가족부 앞에서 시위 중인 분들은 이 추운 날씨에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12월의 매서운 한파에도 수그러들지 않는 성평등 반대의 외침을 듣고 있노라면 혹시 그것이 다른 의도를 지닌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민주주의와 인간의 평등에 대한 거부, 여성을 앞세운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 수십여년 간 독점해 온 권력을 놓고 싶지 않은 지배세력의 탐욕.

 

16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2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공청회에서 기습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여성신문
16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2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공청회에서 기습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여성신문

다른 물음을 던져보자. 왜 성적 지향은 평등해서는 안 되는가? 필자가 보기에 성적 지향은 명백히 개인의 권리다. 개인에 대한 존중이나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워낙 뒤쳐진 한국사회에서 성적 지향을 개인적 권리라고 주장해 봤자 별 소득이 없을 것이라는 점은 필자도 잘 안다. 그러나 그 개인이 보통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로, 주변의 주변으로 쫓겨나 있다면?

페미니즘의 출발은 ‘주변인의 관점’, 요즘 말로 ‘을의 위치’에 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이 성소수자를 외면할 수도, 외면해서도 안 된다. 그냥 지켜볼 지, 아니면 맞서 싸울 지는 각자의 판단이겠지만, 연대든 네트워크든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성을 포함한 광범위한 시민사회의 연대와 ‘을들의 실천’만이 호모포비아라는 포장을 쓴 정치적 반동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