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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슬픔으로 견디겠다고 나는

썼던가 내가 사랑하는…이라고

청승을 떨었던가 아니면 참혹한 여름이라고

엄살을 떨었던가 너 떠나고 나면 이 세상에 남은

네 생일날은 무슨 날이 되는 거냐고 물었던가

치마폭에 감추면 안 되겠냐고 영화 속에서처럼 그러면

안 되겠냐고

문을 쾅쾅 두드리며 그들은 올까

모든 전쟁의 문이 열리고

모든 전쟁의 문을 막아서며 없어요 없어요

고개를 젓는 여자들이 쏟아져나온다

치마폭에 감추면 안 되겠냐고...치마폭에 한 남자를 감춘 여자가 총

을 맞고 쓰러진다. 남자는 지금 막 숨이 끊어진 여자의 피를 벌컥벌

컥 마신다. 소파의 솜을 다 뜯어내고 한 여자가 거기에 그를 숨길

방을 만든다. 피아노 속을 다 뜯어내고 한 여자가 그 속에 그의 침

대를 숨긴다. 그 피아노는 건반을 두드려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항아

리에 결사적으로 걸터앉은 여자가 소리친다. 없어요없어요 난 안 감

췄어요. 헛간에까지 쫓긴 여자가 지푸라기 속에 감춘 남자 위에 드

러눕는다. 없어요 없어요 난 안 감췄어요. 그들이 지푸라기 위에 불

을 싸지른다.

이 다음에 나 죽은 다음에

내 딸은 나를 어떻게 떠올릴까

이마를 다 뜯어내고

아무도 몰래 다락방을 만든 엄마

밤이 무거워 잠이 안 와

자다 일어나 안경을 쓰고

없어요 없어요 난 안 감췄어요

잠꼬대하는 그런 엄마

비녀 꽂을 머리칼도 몇가닥 남지 않은 할머니

지팡이에 온몸을 의지한 채

저녁마다 언덕에 올라 동구

밖 내려보시며

민대머리 절레절레

없어요 없어요 난 안 감췄어요

무화과나무 한 그루 그 큰 손바닥으로

꽃도 안 피우고 맺은 열매를 가리고

비 맞고 서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 김혜순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1994)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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