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토반 거쳐 도착한 펜징

닥종이 조형 작가

김영희를 만나다

 

작가 김영희의 집. 널따란 홀에는 한국식으로 차를 마실 수 있는 다실이 있다. ⓒ박선이
작가 김영희의 집. 널따란 홀에는 한국식으로 차를 마실 수 있는 다실이 있다. ⓒ박선이

아비뇽에서 에든버러로 가는 길에 뮌헨에 들른 것은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한지를 속속들이 해체하고 다시 빚어 아이와 여성의 형상을 만들어온 닥종이 조형 작가 김영희.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세 아이를 데리고 독일로 떠난 지 햇수로 10년 만에 귀국해 전시회를 열 때였다. 벽제의 한 농장에서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던 그는 햇살 아래 눈부셨다. 등에는 독일서 얻은 막내를 업고 있었다. 포대기를 두른 예술가라니! 그 뒤로 우리는 예술가와 기자라는 관계를 넘어, 엄마 대 엄마로 우주의 비밀을 공유하는 은밀한 우정을 누려왔다. 다섯 아이 낳아 키운 그의 지혜와 감성은 딸 하나 만으로도 헉헉 대던 나에게 촌철살인의 위로였고 깨우침이었다.

뮌헨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펜징(Penzing)까지 깜깜한 빗길이었다. “엄마, 차 잘 체크했어?” 구글 지도를 켜면서 딸이 물었는데, 귓등으로 가볍게 넘기고 덜컥 고속도로에 들어선 게 잘못이었다. 뒷 차들이 전조등을 번쩍거리는가 하면 ‘빵!’하고 경고음을 던진다. 심지어 내 옆으로 다가와 빗속에 차창을 열고 손으로 반짝 반짝 표시를 하고 간다. 뭐가 문제지? 옆자리 앉은 딸은 전전긍긍. 여기가 바로 그 제한속도 무제한인 아우토반 아닌가. 갓길 따윈 보이지도 않는다. 할 수 없이 뮌헨 시내로 들어섰다. 아비뇽에서 내 휴대폰을 도둑맞은 터라, 딸 휴대폰의 구글 내비게이션이 생명선이다. 딸은 연신 검색 명을 새로 넣으며 조수 역할에 매진한다. 한 아파트 단지 앞에 차를 세우고 자동차를 살폈다. 전조등도 후미등도 다 문제없는데. 뭐야!!!! 다시 고속도로로 들어섰는데, 똑같은 상황이 계속된다. 1시간 거리를 2시간도 넘게 걸렸다. 밤 12시가 넘은 시각. 펜징에 도착하니, 사위가 고요하다. 비는 그쳤다.

 

건물을 따라 꽃밭이 길게 이어진다. 샛노란 금잔화와 붉은 달리아, 연보랏빛 도라지꽃이 마당 한가득 마치 인상주의 풍경화 같다. ⓒ박선이
건물을 따라 꽃밭이 길게 이어진다. 샛노란 금잔화와 붉은 달리아, 연보랏빛 도라지꽃이 마당 한가득 마치 인상주의 풍경화 같다. ⓒ박선이

아침 햇살이 빛났다.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1992) 『뮌헨의 노란민들레』(1994)부터 『엄마를 졸업하다』(2012) 까지, 김영희의 에세이에 등장하는 그의 펜징 집을 둘러보았다. 300년 넘은 살림집에 400년 가까이 되어가는 외양간을 수리해 만든 갤러리 겸 작업실은 듣던 대로 아름다웠다. 마을 광장을 마주한 살림집 폭은 좁았지만, 뒤쪽으로 갤러리, 작업실, 창고가 길게 이어졌다. 건물을 따라 꽃밭도 길게 이어졌다. 그가 특별히 씨를 받아다 수년째 키웠다는 검은 베고니아처럼 독특한 색깔의 꽃도 있었고, 낯익은 보랏빛 나팔꽃도 있었다. 샛노란 금잔화와 붉은 달리아, 연보랏빛 도라지꽃이 마당 한가득 마치 인상주의 풍경화 같았다. 하나하나 그가 색깔과 높이를 계획한 꽃밭이다.

그는 새벽 4시에는 일어난다. 지금은 자녀들이 장성하여 모두 집을 떠났지만, 그 큰 집에 아이들이 북적북적하던 시절, 모두 잠든 그 시간에 작업을 시작하던 게 몸에 배었다. 여성의 시간은 남성의 시간에 비해 분절된 특성을 가졌다고 한다. 집중력을 가장 큰 미덕으로 하는 남성의 시간이 권력적이고 중앙집중적이라면, 여성의 시간은 끊임없이 단절되고 다시 또 이어지며 바깥과 관계된다. 김영희의 시간도 그랬다. 지지배배 시끌벅적 아침상을 치우면 학교 간 아이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작업을 마치고 살림준비를 해야 했다. 분절된 시간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어디 김영희 뿐이랴. 지금 직장과 가정 일 사이에서 한밤의 빗길 운전만큼 아슬아슬 비상등 켜고 장애물 경주를 하는 여성들 모두의 시간이 그러하리라.

 

김영희의 작업실은 부엌 바로 옆에 있다. 펜징의 이 집에서 살아온 지난 30여년 간, 하루 중 대부분을 작업실과 부엌에서 살았다. ⓒ박선이
김영희의 작업실은 부엌 바로 옆에 있다. 펜징의 이 집에서 살아온 지난 30여년 간, 하루 중 대부분을 작업실과 부엌에서 살았다. ⓒ박선이

김영희의 작업실은 부엌 바로 옆에 있다. 펜징의 이 집에서 살아온 지난 30여년 간, 하루 중 대부분을 작업실과 부엌에서 살았다. 학교 갔다 온 아이들이 제일 먼저 뛰어 들어와 재잘재잘 즐거웠던 일, 힘들었던 일을 털어놓았던 공간이다. “나는 사랑을 함부로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이 나를 배반했을 때 나는 그것을 벗었다”(『발끝에서 손끝까지』 중)고 당당하게 고백했던 그의 삶은 생활과 예술 사이에서 튼실하게 중심을 잡는다. 부엌 건너편 갤러리와 대형 작업실, 창고가 바로 그런 삶을 웅변하는 공간이다. 갤러리는 말 설고 낯 설은 독일 땅에서 예술가로 우뚝 살아남은 김영희의 자존심과 자아가 담긴 곳이다. 널따란 홀에는 한국식으로 차를 마실 수 있는 다실이 있고,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다. 한쪽으로는 자그만 실내 냇물이 흐른다. 컬렉터나 화랑 관계자에게 당당하게 작품을 선보이는 공간이다. 갤러리를 지나 더 깊숙이 들어가면 400년 된 외양간을 고쳐만든 대형 작업장이 나온다. 묵은 흙을 파내고 작업장을 만들 때 주변에서 다들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오랜 생명의 냄새를 맡았다. 사람 키 보다 훨씬 큰 대형 한지 조형들이 그곳에 있었다.

“민들레가 너른 초원에 지천으로 햇살보다도 더욱 강하게 피어났다. 아침의 민들레는 작더라도 너무나 청초하고 꾸밈없는 소박한 정서가 꼭 한국의 여인네 마음 같았고, 어머니를 정말 닮은 한국인이 되고 싶었다.”(『뮌헨의 노란민들레』 중)

아직 색색깔 옷을 입지 않은 하얀 조형물들이 놓여있는 작업실에서, 화사한 꽃밭에서, 일하는 엄마이자 뛰어난 여성 예술가 김영희의 원초적 감성과 사랑, 고독을 보았다. 그는 홀로 이곳에서 닥종이를 이기고 개고 빚어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고 있다.

 

자신의 꽃밭에 선 닥종이 조형 작가 김영희 ⓒ박선이
자신의 꽃밭에 선 닥종이 조형 작가 김영희 ⓒ박선이

* 김영희는 누구?

흔히 닥종이라고 부르는 한지를 소재로 인체 조형물을 만든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린 그의 작품 사진을 보고 한국에 찾아온 독일 대학생의 구애에 그는 아이 셋을 데리고 독일로 갔다. 그의 작품은 독일에서 먼저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네덜란드, 프랑스, 스웨덴, 스페인, 스위스 등에서 지금까지 70여 차례의 개인전과 그룹전, 퍼포먼스를 가졌다. 가느다란 눈과 노래하는 듯 오므린 입, 발간 볼과 토실토실한 얼굴로 연 날리고 고기 잡는 아이들이 그의 대표작.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는 1992년 초판 발행 당시 200만부가 넘게 팔렸으며 『뮌헨의 노란 민들레』, 『밤새 훌쩍 크는 아이들』 등 뮌헨 생활을 소곤소곤 정감 있게 풀어낸 에세이와 『책 읽어주는 엄마』, 『사과나무 꿈나들이』 , 소설 『러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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