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예산안에서 ‘디지털 성범죄 피해 대응 및 지원’ 예산이 당초 정부가 제출한 7억4000만원으로 최종 확정됐다. 앞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는 여야 합의로 예산을 20억원으로 증액했다. 하지만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로 넘어가면서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관련 예산은 우여곡절 끝에 살아났다.

각 상임위가 심의한 예산을 증·감액하는 권한을 가진 예결특위에서 야당은 여당을 상대로 힘겨루기를 벌이면서 볼모로 잡은 것이 디지털 성범죄 예산이다. 특히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정부 100대 문제사업’으로 분류하고 전액 삭감까지 주장했다.

문제는 정치 공방 속에서 그들의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자유한국당 김성원 의원은 지원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 법률에 근거를 마련한 후에 예산을 책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법 조문을 소극적이고 보수적으로 해석하더라도 대전제는 피해자 보호여야 한다.

검사 출신의 같은 당 김도읍 의원도 성폭력에 대한 사법기관의 태도만큼은 모르는 듯 했다. 몰카(불법촬영)로 인한 피해는 엄청나고, 시간 끌 이유가 없다면서도 “수사기관에 가면 빨리 진행된다. 언제 여가부 모니터링하는 상담사에서 상담하고, 관할 경찰서를 찾아가나”라고 주장했다.

같은 검사 출신의 국민의당 김경진 의원 역시 경찰에 IP 추적 수사권이 있다며, “이 예산을 차라리 경찰에 준다면 강력히 대처할 수 있다. 경찰에 이 기능을 부여하고 이 돈을 주는게 효과적”이라고 거들었다.

성폭력 피해를 입고 경찰에 신고하더라도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경우는 흔하다. 예산안이 통과된 지난 5일에도 성폭력 피해자의 신상정보가 구체적으로 나와있는 텀블러의 게시물 수사를 경찰에 요청했지만 출동조차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2년 넘게 성범죄 영상과 사진을 경찰서에 신고하는 활동을 해온 해당 단체는 경찰의 이같은 대응 태도가 한 두번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절반으로 삭감된 예산은 최종 타결 직전 살아났다. 운 좋게 살아남은 ‘문재인 예산’이 아니라 여·야가 문제의 심각성에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그 마음 그대로 정부가 시작할 디지털 성범죄 사업에도 머리를 맞댔으면 한다. 영상 삭제는 사후 대책일뿐 문제 예방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사법기관의 변화는 물론이거니와 텀블러·페이스북 등 해외 업체의 수사 협조도 이끌어내야 한다. 미성년자의 피해가 심각한 채팅앱 등을 규제할 법안도 필요하다. 정말 디지털 성범죄에 대응하려면 할 일이 태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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