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정책 대상에서 ‘정책 생산자’ 되다
여성, 정책 대상에서 ‘정책 생산자’ 되다
  • 이하나 기자
  • 승인 2017.12.06 15:19
  • 수정 2017-12-08 17: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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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젠더 거버넌스’ 본격화

풀뿌리 여성활동가 200여명

25개 자치구 108개 사업

‘여성의 눈’으로 들여다봐

공중화장실 설계 바꾸고

성별 통계 산출 요구도

 

지난 1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젠더 거버넌스 한마당’에서 풀뿌리 여성 활동가들이 성인지 모니터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서울YWCA
지난 1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젠더 거버넌스 한마당’에서 풀뿌리 여성 활동가들이 성인지 모니터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서울YWCA

서울에 사는 여성 200여명이 25개 자치구 108개 사업을 ‘여성의 눈’으로 들여다 봤다. 평범한 주부나 직장인이던 여성들은 지난 1년간 교육과 워크숍을 거쳐 모니터링 현장을 뛰면서 ‘풀뿌리 여성활동가’로 성장했다. 정책 대상이자 소비자였던 이들이 ‘정책 담론의 생산자’로 설 수 있었던 계기는 ‘젠더 거버넌스’(Gender Governance)를 통해서다.

서울시는 올해 ‘시민참여 젠더 거버넌스를 통한 시정 성인지성 강화기반 구축사업’을 추진했다. 젠더 거버넌스는 시민이 생활 속 정책에 대해 성차별적 영향이 없는지 살펴보고, 행정과 함께 정책을 점검, 평가해 변화를 만들어가는 협치 활동이다. 지난해까지 10여개 자치구를 대상으로 펼치던 사업을 올해 처음으로 25개 자치구 전역에서 실시했다. 처음으로 서울 전 지역에서 실시한 젠더거버넌스 시도다.

시에서는 젠더정책팀과 협지지원관이, 민간에선 서울YWCA와 풀뿌리여성센터 ‘바람’이 총괄추진기구로 참여했고,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전문가로서 지원했다. 본격적인 사업의 시작은 지난 4월부터다. 서울YWCA, 풀뿌리여성센터 바람은 자치구 별로 여성모임과 단체의 문을 두드려 성인지 모니터링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 이미 모임이 있는 지역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절반이나 됐다. 그런 곳에선 복지회관 등 소규모 모임이나 개인을 일일히 찾아다녀야 했다. 여성주의 조직이 활동 중인 자치구는 12곳으로 나머지 12곳 중 5곳은 최근 1~2년 간 여성주의 그룹이 형성되고 있다. 특히 이번 사업을 통해 일부 자치구에선 지역 기반의 여성주의 모임이 새로 조직되는 움직임도 보인다.

이렇게 모인 여성 200여명 자치구별로 모니터링단 양성교육을 받았다. 성인지 감수성 교육부터 모니터링 실천교육 까지 약 4회 동안 활동과 직결되는 성주류화 정책, 예산 등을 주제로 교육이 진행됐다. 하지만 시작부터 쉽진 않았다. ‘젠더 거버넌스’ ‘성인지’ ‘협치’라는 생소한 단어가 첫번째 ‘벽’이었다. 모니터링에 참여한 한 활동가는 “네 번의 교육으로 성인지 관점이 무엇인지, 모니터링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이해하기는 어려웠다”면서 “아는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나. 숙지하고 했으면 더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라고 아쉬워했다.

교육과 워크숍을 마치고 여성들은 일자리, 안전, 복지 분야의 사업 중 자치구별 3~4개를 선정해 현장 모니터링을 진행했다. 찾아가는 일자리발굴단 사업, 공중화장실 사업, 범죄예방디자인 사업, 아이돌봄지원사업, 치매지원센터 운영사업 등 생활밀착형 사업이 대부분이다. 본격적인 현장 모니터링은 무더위가 한창인 8~9월에 진행됐다. 걸어서 혹은 스쿠터를 타고 동네 곳곳을 살핀 풀뿌리 여성 활동가들의 의욕을 꺾은 건 더위가 아닌 협조하지 않는 공무원들이었다.

 

지난 1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젠더 거버넌스 한마당’에서 풀뿌리 여성 활동가들이 성인지 모니터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서울YWCA
지난 1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젠더 거버넌스 한마당’에서 풀뿌리 여성 활동가들이 성인지 모니터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서울YWCA

지난 1일 시청 다목적홀에서 그간의 젠더거버넌스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 열린 ‘젠더 거버넌스 한마당’에서 이같은 아쉬움이 쏟아져나왔다. 한 활동가는 소감을 통해 “성인지 모니터링에 대한 이해가 낮고 선입견도 두터워 행정과 소통 과정에서 어려움을 느꼈다”고 했고, 또 다른 활동가는 “공무원들이 모니터링 취지를 ‘개입한다’ ‘일만 만든다’고 왜곡해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다. 시민과 함께 하는 협치의 의미가 확산돼야 한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실제로 활동가들이 젠더 거버넌스의 ‘걸림돌’로 첫 손에 꼽은 것은 역시 행정의 협조 부족이다. 정보 부족을 토로하는 이들도 많았다. 활동가들이 관련 부서에 사업 관련 자료를 요청하면 늦게 주거나 서류가 미비한 경우가 많았고, 아예 없다고 하는 사례도 있었다.

반면에 공무원의 적극적인 협조로 순조롭게 성인지 모니터링을 진행하고 눈에 띄는 변화를 이끌어낸 경우도 여럿이다. 광진구 모니터링단은 아이돌봄지원사업을 모니터링해 수혜자 분석이 잘못됐다는 점을 찾아냈다. 돌봄을 희망하는 가정에 아이돌보미를 파견하는 이 사업의 수혜자는 ‘양육자’지만, 이 사업의 위탁기관은 수혜자를 ‘아동’으로 놓고, 남녀 아동의 성비는 맞추는데 집중해왔었던 것이다. 활동가들은 수혜자를 성인으로 변경해 수혜 분석을 재고하고 서비스 이용자의 만족도와 개선 사항을 조사해 반영하라는 개선안을 내놨다

중구는 노후된 공중화장실 고치는 환경개선 사업의 문제점을 찾아내 공사 설계도를 바꾸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신당동에 위치한 공중화장실은 오래되고 남녀 공용화장실이라 분리공사와 전면보수를 진행 중이었다. 전화정(45)씨는 “워낙 공간이 좁은데다 공용화장실이라 여성주민들은 이용에 다소 불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며 조도를 높이고 비상벨 시스템을 개선할 것을 제안했다. 화장실 건물 위 물탱크도 철거됐다. 광희동 공중화장실은 정화조 환기구가 칸마다 설치돼 있어 악취가 심했다. 활동가들은 악취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환기구를 밖으로 빼도록 설계 변경을 제시했다. 담당 공무원, 시설공사 책임자가 이를 받아 들여 결국 공사 설계도가 변경됐다. 양재연(47)씨는 “모니터링 결과에 공무원들의 관심을 가져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양씨는 “모니터링단 인원이 적고 과제 선정에도 협조가 잘 안돼 지칠 때도 있었다”며 “모니터링 활동이 아니더라도 구민, 시민이 불편함을 느낄 때 해당 자치구에 쉽고 간단하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씨도 “중구에는 풀뿌리 여성조직이 없다보니 처음 모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며 “지속적인 변화를 위해 여성모임이 조직화되고 모니터링도 꾸준히 이어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사업을 총괄한 김고연주 서울시 젠더정책팀 팀장(젠더자문관)은 “처음 25개 자치구에서 젠더 거버넌스를 시도했는데 모니터링 과정과 결과를 확산하고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내년 사업에선 모니터링 사업과 성별영향분석평가 사업을 연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박원순 서울시장은 “25개 자치구가 모두 참여해 보텀업(상향식) 방식으로 협치를 하고, 그 과정에서 여성단체가 만들어졌다는 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면서 “제안한 정책들이 공유되고 실현되도록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 젠더 거버넌스(Gender Governance)

성인지 관점으로 민·관이 공동으로 정책을 점검, 평가해 개선하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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