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낙태죄 폐지를 위한 2017 검은 시위’

자유발언대에 선 여성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 앞에서 2017 검은시위 ‘그러니까 낙태죄 폐지’를 열고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 앞에서 2017 검은시위 ‘그러니까 낙태죄 폐지’를 열고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 낙태를 금하되,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 등 극히 일부 경우에만 ‘합법적 임신중절’을 허용하는 나라다. 어떤 여성들은 이 실낱같은 가능성에 목숨을 건다. 대학생 B씨는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피임 실패로 원치 않는 임신을 했지만, 이 남성의 협박 탓에 임신중절 시술을 받을 수 없었다. 뇌졸중 환자로 평소 항경련제를 복용해온 B씨는, 건강상 문제가 있으면 합법 임신중절을 할 수 있다는 판단에 약을 끊었다. 경련 발작이 일어났고, 병원에 실려 가 치료받는 과정에서 뱃속의 태아가 자연 유산됐다. “B씨는 살아났다는 사실보다 임신중절을 했다는 데 더 복잡한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B씨의 남자친구는 자연유산임을 증명하라며 병원에 진단서를 요구했고, 어머니는 ‘진짜 유산됐느냐? 나중에 육아 비용을 청구하는 게 아니냐’며 따져 물었다고 한다.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장은 합법 낙태 시술을 해온 의사다. 2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를 위한 2017 검은 시위’ 자유발언대에 선 그는 의료 현장에서 만난 여성들의 사연을 전했다. 

10대 여성 A씨의 사연은 현 모자보건법 제14조에 따른 합법 임신중절조차 실제로는 거의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A씨는 성폭력을 당했고, 임신 사실을 16주가 되어서야 알았다. 임신중절을 결심하고도 병원을 네 번이나 전전했다. ‘여기는 성폭력 전담 기관이 아니니 다른 데로 가라’는 병원, ‘성폭력 피해 사실을 합법적으로 입증해야만 시술해줄 수 있고, 입증은 어렵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고 시술하고 싶다면 150만원을 내라’는 병원도 있었다. 한 병원에선 부모의 동의를 요구했는데, 가정폭력 피해자인 A씨는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를 거부했다. 결국 성폭력상담소에 도움을 요청한 끝에야 다른 병원에서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법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임신중절 시술 의료진에 대한 고발과 처벌이 이어지면서 오히려 여성의 안전만 위협하고 있다. 의료진이 책임을 회피하면서 여성이 시술 후유증·부작용 등 위험을 고스란히 떠안는 현실이다. 40대 여성 C씨는 임신 16주 즈음 중절 시술을 받았다가, 장이 파열돼 고통스러워하며 다른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왜 애초에 시술을 받은 병원을 찾아갈 수 없었을까. 당시 시술을 받기 위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의사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기 때문이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지만, 의료진은 애초에 C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고 했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 앞에서 2017 검은시위 ‘그러니까 낙태죄 폐지’를 열고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 앞에서 2017 검은시위 ‘그러니까 낙태죄 폐지’를 열고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 해 임신중절 건수가 17만 건이라며 ‘17만 명의 태아가 사라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엄청난 고민을 하고, 자기 몸에 뭐가 맞는지도 잘 모르고 위험한 시술을 받는 여성이 17만 명이라는 겁니다.” 윤 과장은 ‘여성의 권리 대 태아의 권리’라는 이분법을 넘어 임신중절을 고민하는 여성의 삶과 건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여성들에게 임신중절은 한 선택지가 아니라 마지막 비상구 아닌가요. 비상구를 안전하게 통과할 권리도 여성의 건강권입니다.” 

이날 시위와 행진은 한국여성민우회, 건강과대안 등 11개 단체와 조직이 모인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 주최했다. “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 기획”된 시위다. 주최 측은 “우리의 삶과 몸이 어떠한지 말해서 청와대에 전달하고 싶다”는 취지에서 행진 중간중간 자유발언대를 열었다.

 

2일 검은 옷을 입은 시민들이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며 청운효자동주민센터까지 행진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일 검은 옷을 입은 시민들이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며 청운효자동주민센터까지 행진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성폭력 피해자는 임신중절 허용되는데 왜 ‘낙태죄’ 폐지?

성폭력 피해자가 임신중절 시술을 받으려면 ‘강간 입증’을 해야 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앎’ 활동가는 이날 자유발언대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불편과 피해에 대해 설명했다. “병원은 확실한 피해 사실 입증 없이는 수술을 피합니다. 피해자는 원치 않는 임신 중단을 위해 원치 않는 고소를 해야 합니다. 2차 피해를 입기 십상이고, 검사나 가해자에 의해 무고로 몰릴 위험도 있습니다.”

현재 ‘강간 또는 준강간’을 판단할 주체나 절차, 판단 기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경찰, 법원, 의료진 등 관련자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고스란히 피해자가 감수하고 있다. 피해자는 진료 과정에서 ‘화간’으로 의심받는 2차 피해도 입고 있다. 앎 활동가는 “법에서 인정하는 ‘성폭력’의 범위가 너무 협소하다. 신체적 폭력이 있어야만 성폭력이 아니다. 성폭력이 발생하는 맥락은 훨씬 넓고 다양하다. 동의하에 성관계했어도 상대가 콘돔을 일방적으로 빼 버렸다면 성폭력으로 볼 수 있다. 모자보건법상 예외조항으로는 모든 피해자를 구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는 여성의 자기결정권,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면서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생명권을 추구하겠다고 한다”며 ‘낙태죄 폐지’를 촉구했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 앞에서 2017 검은시위 ‘그러니까 낙태죄 폐지’를 열고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 앞에서 2017 검은시위 ‘그러니까 낙태죄 폐지’를 열고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1980~1990년대에 성행했고 지금도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는 ‘여아 낙태’ 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박차옥경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은 ‘태아의 생명권’을 논하는 국가의 모순적인 행태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국가가 여아 낙태를 처벌한 적 있었습니까? 법(낙태죄)은 일제강점기에 처음 만들어진 이후로 한 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대를 이을 남자가 필요하다며 일어나는 여아 낙태엔 아무렇지 않아 하다가, 왜 이제 와서 죄라는 것입니까? 왜 여성에게만 책임지라고 합니까?” 그는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라고 비판했다. 

임신중절은 이성애자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성소수자들도 존재한다. 이들은 다중의 차별과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활동가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확신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남성과 원치 않는 성관계를 한 후 임신할까 두려워했던 경험을 고백했다. 그는 “10대 성소수자들은 임신·출산·피임에 대해 무지하며, ‘아웃팅’ 협박 범죄, 교정 강간 등 원치 않는 성관계로 임신할 수 있는 상황에 무방비하게 놓여 있다”고 말했다. 

“국가가 원하는 정상성의 기준에 맞춰 생명이 선별”되는 현실, “국가가 낙태죄를 명분 삼아 우리의 섹슈얼리티를 규제하고 처벌하는 것”이 문제라고 그는 강조했다. “우리 모두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 삶을 위해서 낙태죄를 폐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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