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폭력상담소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세상을 바꾸고자 용기낸 생존자들

“나는 말해왔고 말하고 있고

앞으로도 말할 겁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지난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 50주년홀에서 2017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______, 마이크를 잡다’를 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지난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 50주년홀에서 2017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______, 마이크를 잡다’를 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성폭력 생존자들의 고백과 증언이 이어지는 나날이다. 지난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벌어진 ‘#OO_내_성폭력’ 고발에 이어 최근 쏟아진 직장 내 성폭력 실상은 한국사회의 강간문화를 여실히 드러냈다.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페미니스트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의 말처럼 여성의 ‘말하기’는 우리사회에 거대한 태풍을 몰고 올 힘을 갖고 있다. 공고한 가부장제와 성차별적 구조를 무너뜨릴 힘 말이다.

“불꽃같은 목소리로 세상을 터뜨리자!” 지난 11월 24일 한국성폭력상담소가 ‘______, 마이크를 잡다’를 주제로 연 2017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에서 생존자들은 외쳤다. “지금도 입 밖으로 그 일을 꺼내는 게 쉽지 않다”는 이들은 용기를 냈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였다.

이날 무대에는 생존자 5명이 올랐다.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고 말하기대회를 이끌어간 그들에게는 ‘이끔이’라는 이름이 부여됐다. 이끔이들의 말에 참여자들은 귀를 기울였다. 때로는 공감의 표시로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때로는 참기 힘든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에 의한 가정폭력과 친족성폭력을 겪은 생존자 A씨는 말했다. “고통으로 점철된 지난한 삶이었지만 내 삶은 틀리지 않았음을 밝히고 싶었어요. 저도 다른 이와 같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일련의 사건이 지나는 동안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내었습니다.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그 어디에도 지지 않을 거예요. 나는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고 있고 앞으로도 말할 겁니다. 그대들의 ‘말하기’에 무한한 지지를 보냅니다.”

 

지난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2017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에서 ‘이끔이’가 발언을 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지난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2017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에서 ‘이끔이’가 발언을 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B씨는 미성년자였던 당시 지인에 의해 성폭행 피해를 입었다. 그는 “그 사건 이후 나에게 향하는 여러 개의 시선을 느꼈다”며 “생존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상처를 보듬으려 하는 생존자들에 지지를 보낸다”며 “우리는 끊임없이 말하고 또 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족아동성폭력 생존자인 C씨는 피해 이후 35년 만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우리에게 분노하는 신이 있었다면 제가 이 자리에 서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건 이후 이 세상이 공유하는 가치들이 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남성들의 자기연민의 찌꺼기를 받아내는 삶이 여성의 삶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죠. 여성에 대한 차별은 일상적으로 깊이 개입돼있어요. 성폭력피해자는 피해자임에도 사회적으로 비난받고 매도당합니다.”

사건 이후 C씨는 자신이 고슴도치처럼 변해버렸다고 했다. “제가 커밍아웃하면 불쌍하거나 안타깝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들이 저를 향해 보여주는 감정은 저를 향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죠. ‘내가 이런 일을 겪지 않아서 다행이야’라는 자기 위안·연민 말이에요. 그들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감정을 느끼며 저는 불편함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성폭력 사건 이후 생존자들은 알게 된다. 이 사회가 철저히 남성 중심적이며 여성의 목소리를 지우려 한다는 것을. C씨는 말했다. “그동안 벽장 밖에는 저만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꽤 많은 이들이 벽장 밖으로 던져지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진실을 보게 되죠. 저는 오늘 저를 피해자나 생존자가 아니라 진실을 목격한 ‘증언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 벽장 안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진실을 외면하고 비겁하게 피해자에게 낙인찍으며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용감하게 커밍아웃하라’고.”

허름한 동네에 살았던 D씨는 어린 나이, 어두운 골목길에서 성폭력을 겪었다. D씨는 “당시 내가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달리기뿐이었다. 이로 인해 굉장한 무력감을 경험했다”고 고백했다. “폭행 앞에 ‘성’이 붙으면 애꿎은 피해자에게 잘못을 돌려요. 이게 바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죠. 최근 피해자를 대하는 차가운 여론을 보며 한국사회에서 성폭력생존자로 살아가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는 걸 다시 알게 됐어요. 하지만 전 제 인생을 분노와 좌절이 아닌 낙관으로 채울 겁니다. 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말하기대회 행사장에 마련된 ‘지지의 목소리’ 게시판. ⓒ한국성폭력상담소
말하기대회 행사장에 마련된 ‘지지의 목소리’ 게시판. ⓒ한국성폭력상담소

지인에 의한 성폭력을 경험한 E씨는 “발언하러 나오기 전 고민을 거듭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내게는 말할 자격이 없는 것 아닌가?’ ‘다른 이의 기회와 시간을 뺏는 것 아닌가?’라는 우려에 말하기를 주저했어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봤죠. 그리고 깨달았어요.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름의 덩어리가 아닌 개개인의 인간이고 성폭력이라는 경험 하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흔하고 하찮고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될 수 없다는 것을요.”

이날 대회에는 110여명의 참여자와 5명의 이끔이가 함께했다. 올해는 참여자들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열린 말하기’ 시간이 마련됐다. 참여자 중 말하기에 나선 생존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아픈 걸 말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아요. ‘말하기’가 정말 중요한 이유입니다.” “성폭력을 당했다면 꼭 신고하라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사례가 쌓이고 축적돼야 우리상황에 맞게 법이 바뀌고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는 한국성폭력상담소가 2003년부터 진행해온 행사다. 삶을 이끌며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말함으로써 서로 공감하고 지지하며 용기를 북돋우는 치유의 장이다. 침묵을 깨고 세상을 향해 성폭력에 대해 발화함으로써 사회변화를 이끌어내는 연대의 장이기도 하다. 2007년부터는 ‘작은말하기’도 진행해왔다.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마다 열린다. 일상적이고 상시적인 말하기, 다양한 형태와 방식의 말하기, 참여자 간의 긴밀한 소통으로 이어지는 말하기를 꾀한다.

이날 행사 사회를 맡은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작은말하기에서는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 것뿐만 아니라 ‘사건 이후 재판에서 어떻게 변론했나’ ‘어떻게 사과 받았나’ 등과 같은 정보도 교류한다”며 “개개인의 경험을 나누면서 여성들이 (성폭력 가해자에 맞서) 이겨나갈 수 있는 있는 노하우를 쌓아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작은말하기는 굉장히 단순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말하기’ 장이다. 그런데도 저희 상담소 말고는 하고 있는 데가 별로 없다”며 “생존자들이 말할 수 있는 장이 앞으로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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