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절은 여성의 목숨과

존엄이 걸린 중요한 문제

남성에게 피임·임신의 책임

묻지 않는 이중 잣대 합당한가

 

 

지난해 10월 17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여성, 장애, 법률, 의료, 시민사회단체 등 각계 구성원들이 모여 인공임신중절 처벌 강화하는 의료법 개정 입법예고안 철회와 형법상의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지난해 10월 17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여성, 장애, 법률, 의료, 시민사회단체 등 각계 구성원들이 모여 인공임신중절 처벌 강화하는 의료법 개정 입법예고안 철회와 형법상의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5년 전 일이다. 여성 A씨는 성폭력을 당해 임신했다. 부모님에게 알리기 싫어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임신 4주 차에 중절 시술을 받기로 했다. 모자보건법상은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일 경우 예외적으로 임신중절 시술을 허용한다.

산부인과 측은 A씨에게 ‘성폭력 피해자라는 사실부터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성폭력 피해상담사실 확인서만으론 불충분하니, 고소사실확인서를 가져오라며 A씨를 돌려보냈다. A씨는 고민 끝에 가해자를 고소했다. 이번엔 경찰이 문제였다. 담당 조사관은 A씨에게 ‘가해자는 합의된 성관계라고 주장한다’, ‘낙태하려고 허위 고소한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가해자가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을 때, A씨는 임신 14주차였다. 이전보다 더 큰 시술 위험과 비용을 감내해야 했다. 병원은 시술 직전 그에게 “성폭력에 의한 임신이 아니면 책임지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했다. 지난 9월 28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출범식에서 A씨는 이 얘기를 털어놓으며 “억울했지만 내 몸이 인질로 잡힌 듯해 어쩔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만약 경찰이 증거 불충분 등으로 ‘성폭행으로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면 어땠을까. 병원이 불법이라는 이유로 끝내 시술을 거부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답은 명백하다. 출산계획이 없는데도, 하물며 성범죄로 인한 임신인데도, 내 육체적·정신적 건강을 망가뜨리는 선택을 할 여성은 없다. A씨는 더 큰 위험과 비용을 감수하고라도 임신중절을 했을 것이다.

뜨거운 낙태죄 논쟁 속에서 지워지면 안 될 중요한 지점이 여기다. 임신중절은 여성의 목숨과 존엄이 걸린 문제다. 그리고 이제 임신과 출산은 각 개인이 주어진 조건에서 최적의 선택을 내리는 ‘경제학의 문제’가 됐다. 임신중절은 태어날 아이와 가족 그리고 임신과 출산의 주체인 여성의 삶에 관한 고민 끝에 나온 진지하고 책임 있는 결론으로 봐야 한다. 

실제로 한국 여성 970명 중 190명(19.6%)은 인공임신중절 경험이 있다고 한다. 원하지 않은 임신(43.2%)으로 인한 경우가 대다수고, 산모의 건강 문제(16.3%), 경제적 사정(14.2%), 태아의 건강문제(10.5%), 주변의 시선(7.9%), 부모가 될 자신이 없어서(3.7%) 등 현실적인 이유로 인한 결정이다(보건복지부, 2015 인공임신중절 국민인식조사). 

낙태죄 폐지 반대 진영은 이런 점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임신중절은 마치 살인적인 바이러스와도 같아, 순식간에 사회를 오염시킬 거라는 공포와 의심을 부추긴다. ‘태아는 생명, 낙태는 살인’이라는 주장은 어떨까.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 법체계에서 태아 생명이 갖는 지위는 사람의 것과 확연히 다르다. 전문가들은 태아는 모체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생명권과 그 법적 지위를 동등하게 보기 어렵다는 점을 수차례 강조해왔다.

이제 낡은 찬반논쟁의 틀을 깨자. 성관계는 둘이 했는데 여성만 처벌하는 낙태죄는 어떤 사회적 편익을 낳는지, 남성에게 자유롭게 섹스할 권리를 허용하면서 피임과 임신의 책임은 묻지 않는 이중 잣대가 합당한지 논의할 때다. 낙태죄 폐지 없이는 성평등 사회로 갈 수 없다. 참가자 23만을 돌파한 낙태죄 폐지 국민청원에 대한 청와대의 답변이 이달 말 나온다고 한다. 여성들의 외침에 부응하는 답변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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