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운동 30년, 용기와 연대의 기록] ⑨ 젠더 불평등 바로잡기 위한 ‘새판짜기’ 전략
[여성운동 30년, 용기와 연대의 기록] ⑨ 젠더 불평등 바로잡기 위한 ‘새판짜기’ 전략
  • 신상숙 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
  • 승인 2017.11.22 11:53
  • 수정 2017-11-22 17: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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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이 정책현장에

개입하는 디딤돌 ‘성주류화’

여성부, 성인지예산제 등

정책추진체계 변화 촉진과

거버넌스 활성화에 기여

 

1995년 북경에서 열린 제4차 유엔 여성회의 ⓒ한국여성단체연합
1995년 북경에서 열린 제4차 유엔 여성회의 ⓒ한국여성단체연합

1995년 8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4차 유엔 세계여성대회는 189개 유엔 회원국의 정부·비정부기구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베이징선언문과 361개 행동강령을 채택했다. 제4차 세계여성대회는 무엇보다 21세기 여성정책의 방향을 예고하는 화두로 ‘성주류화(gender mainstreaming)’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제4차 세계여성대회는 진보적 여성단체들의 상설 연대조직으로 1987년에 만들어진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성연합)’이 창립 이래 처음으로 참가한 국제대회였으며, 한국의 여성운동이 성주류화에 관한 논의를 공유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베이징 행동강령에 의하면, 성주류화란 정부와 공공기관의 모든 정책과 프로그램에 젠더 관점(gender perspective)을 고려해 적극적이고 가시적인 변화를 촉진하는 전략을 뜻한다. 대회 행동강령의 전략목표와 12개 분야 전반에 걸쳐 성주류화가 강조된 배경에는 발전으로부터 소외된 여성만을 대상으로 삼았던 기존 여성정책의 방향에서 벗어나 성별관계의 불평등을 야기하는 구조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놓여 있었다. 요컨대 성주류화는 기존의 여성정책을 재편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수단을 확보하기 위한 이행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성주류화는 향후 20년에 걸쳐 한국의 여성운동이 정책현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했으며, 여성정책기구와 정책추진체계의 변화를 촉진하고 거버넌스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여성의 정치적·경제적 주류화 모색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직후 1995년 9월에 대통령직속기구인 세계화추진위원회는 ‘여성의 사회참여 10대 과제’를 서둘러 내놓았으며, 이에 대해 여성연합은 같은 해 10월 11일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환영의 입장을 밝히는 한편, 여성부의 설치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이러한 요청을 묵살하고 여성계의 충분한 의견수렴을 거치지 않은 채, 1995년 12월에 국회 회기종료를 앞두고 ‘여성발전기본법’의 제정을 강행했다. 기본법 제정의 필요성에 공감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성계가 선뜻 환영하기 어려웠던 것은 ‘여성발전기본법’이라는 명칭이 법제정의 취지를 담보하기 어렵고 여성정책 주무부처의 신설에 대한 방안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연합은 1997년을 ‘여성의 정치적‧경제적 주류화를 위한 도약의 해’로 선언하고 이를 중점 사업으로 선정하였다. 당시 여성연합과 회원단체들은 성주류화를 우선 ‘여성정책의 주류화’로 접근하고자 하였는데, 여성의 정치적‧경제적 세력화를 바탕으로 여성정책을 주변의 위치에서 중심으로 진입시키는 것을 성주류화의 1차적인 과제로 상정했던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성주류화가 정착되는 과정은 이해의 편의상 세 단계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여성부의 신설을 비롯해 성주류화를 실행할 여성정책 추진기구와 추진체계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기까지의 과정이다. 둘째는 여성부의 출범과 더불어 성인지 예산제도와 성별 영향평가, 성별 분리통계와 같은 성주류화의 기법과 수단이 법제화됨으로써 성주류화 운동의 전문성이 높아지는 준비단계다. 셋째는, 성주류화가 지방정치와 지역사회 차원으로 파급돼 조밀한 협력체계를 형성하는 분화와 확산의 단계다.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여성가족부를 여성부로 축소 존치시키는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하자, 한국여성단체연합과 통합민주당 여성 국회의원들이 ⓒ뉴시스·여성신문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여성가족부를 여성부로 축소 존치시키는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하자, 한국여성단체연합과 통합민주당 여성 국회의원들이 ⓒ뉴시스·여성신문

2001년 1월 29일 여성부 출범

우리나라의 여성정책 담당기구는 1946년 보건후생부의 부녀국이 그 효시라고 할 수 있으나, 정부 수립 이래 주변화 된 부녀복지로 인식되었던 여성정책이 보다 체계적인 틀 속에서 새롭게 모색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이후였다. 그러나 정무장관 체계의 한계를 벗어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여성정책 전담부서의 설치는 여성계의 오랜 숙원으로 남아 있었다.

여성단체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부응하여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출범 직후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법무부 등 6개 정부 부처에 ‘여성정책 담당관실’을 설치하는 것으로 여성정책의 추진체계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입법권과 집행권이 부여되지 않고 국무회의에서 의결권이 제한되는 ‘위원회’의 구조로는 정책에 요구되는 충분한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성부를 설치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마침내 정부조직법의 개정으로 2001년 1월 29일에 ‘여성부’가 출범한 것은 실로 여성정책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신생조직인 여성부는 소규모의 ‘미니 부서’(1실 3국 11과 정원 102명)로 출발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 들어와 규모가 점차 늘어났으며, 2005년에는 가족업무를 이관받아 ‘여성가족부’(1실 4국 2관 19과, 정원 150명)로 거듭나게 됐다.

 

2004년 6월 Beijing+10를 기념해 열린 태국 NGO포럼 ⓒ한국여성단체연합
2004년 6월 Beijing+10를 기념해 열린 태국 NGO포럼 ⓒ한국여성단체연합

전략적 추진과 성인지예산운동

성주류화는 젠더관계의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일종의 전환전략이며, 그것의 적절한 방법과 수단을 정책으로 제도화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성주류화 도구와 관련된 법제의 정비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2002년 12월에 여성발전기본법(현 양성평등기본법) 일부 개정으로 성별영향평가와 성인지통계의 작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조항이 마련됐다. 여성발전기본법의 개정으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성별영향평가가 가능해지자, 여타 법령의 제‧개정 작업도 이어졌다. 국가재정법의 제정(2006)과 지방재정법의 개정(2011)으로 ‘성인지예산제도’가 궤도에 오르게 됐으며, 통계법 개정(2007)으로 성인지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성별 영향분석법이 제정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를 포괄하는 전국 범위에서 성주류화를 실천할 수 있는 제도적 형식이 갖춰졌다.

여성정책 전담기구의 설치, 여성발전기본법과 여성정책 기본계획의 수립과 더불어 성주류화의 가장 기본적인 인프라는 거버넌스(governance), 즉 민‧관 협력체계의 구축을 통한 정책 네트워크의 조직화일 것이다. 이러한 성과들은 대체로 ‘성주류화’가 기본 추진전략으로 설정된 제2차 여성정책 기본계획 기간(2003~2007년)에 뚜렷하게 가시화됐다. 시민의 참여와 거버넌스를 강조한 참여정부에 들어와 여성단체들은 젠더 이슈와 관련된 거버넌스의 파트너로서 정책현장에 광범위하게 참여했고, 참여와 영향의 정치를 펼치는 여성운동은 정부 및 지자체와의 협력체계를 통해 짧은 기간에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위원회의 참여를 통한 정책자문과 공청회를 통한 의견수렴 방식이 관행화되고, 정부의 공모사업 또는 시범사업에 직접 참여하거나 위탁사업의 수행 등을 통해서도 접촉면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정책의 입안과 설계, 실행과 평가에 이르는 전과정에서 NGO의 참여가 필요하고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 됐다.

여성연합과 회원단체들은 이처럼 성주류화의 수단들이 제도로 정착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정책의 전환을 촉구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2001년부터는 젠더 의제의 각 분야에 성주류화를 반영하고 성인지적 예산정책 마련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여성연합은 3년 간의 ‘성인지예산특별위원회’(2002~2004) 활동으로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예산에 대한 성인지 분석 및 여성관련 예산 확대운동을 전개했으며, 정부부처에 예산보고체계를 마련했다.

또한 지방자치와 분권화 시대를 맞이한 한국사회에서 성주류화는 회원단체들이 정책현장을 모니터링하면서 정책대안을 모색하는 활동을 매개하는 수단이 돼주었다. 가령 한국여성민우회와 그 지부들이 2001년부터 3년간 수행한 ‘지방자치단체 여성정책과 예산의 새로운 패러다임 만들기’ 프로젝트도 그런 운동사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예산에도 성(gender)이 있다”는 슬로건을 만들어낸 한국여성민우회의 적극적인 활동은 정부가 성별 영향평가와 성인지예산제도를 도입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며, 연합운동의 차원에서 성인지적 예산수립 논의를 더욱 증폭하고 확대해 나가는 계기가 됐다.

또한 국가재정법의 제정(2006)으로 성인지예산제도에 대한 공동대응의 필요성이 다시 높아지자 여성연합은 지역여성운동센터를 통한 준비 논의를 거쳐 새로운 조직의 창립을 매개했다. 2008년 1월에 발족한 ‘성인지예산전국네트워크’에는 경기여성단체연합, 서울여성의전화, 인천여성노동자회 등 전국 15개 여성단체와 소속 활동가들이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2014년 11월 11일 열린 post 2015 여성운동 미래전망 만들기 심포지엄 ⓒ한국여성단체연합
2014년 11월 11일 열린 post 2015 여성운동 미래전망 만들기 심포지엄 ⓒ한국여성단체연합

역풍의 시대를 넘어

성주류화 전략은 이명박‧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의 집권기에 가혹한 시련을 맞게 되었으며, 이명박정부 대통령인수위에서 흘러나온 ‘여성부 폐지’라는 놀랍고 암울한 소식은 그 시작이었다. 여성계는 물론 야당과 시민사회까지 가세한 격렬한 반대와 저항에 부딪혀 ‘폐지’입장이 ‘축소존치’로 돌아섰지만, 역할과 기능이 대폭 축소된 여성부는 졸지에 ‘초미니’ 부처로 격하되었다. 성평등을 지향하는 여성운동에 적대적인 운동환경과 불통의 정치는 18대 대선으로 당선된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면서 장기화되었다. 비록 다시 여성가족부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으나 여성정책 전담부서의 정책 추진은 점차 형식화되고, 집권 후반기에는 심지어 반인권적인 정책을 강행하여 물의를 빚었다. ‘성평등’을 거부하고 ‘양성평등’의 의미를 좁게 제한하는 유권해석으로 지방정부의 조례에서 성소수자를 배제하도록 압력을 행사한다거나, 피해자 할머니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일 위안부합의를 강행하는 등의 파행이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제약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성주류화와 관련된 여성단체들의 활동과 성찰은 부단히 이어져 왔다. 1995년 제4차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이후 유엔은 5년마다 이행평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평가작업을 주도하고 조직하는 사업 역시 성주류화 관련 활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2004년 베이징+10에 이어 2014년에 베이징+20의 심포지엄을 조직하였다. 국제사회의 추세가 기존의 성주류화 전략을 추구하는 한편 국가발전 패러다임에 성평등 독자목표 (Stand-Alone Goals for Gender Equality)를 병행하는 쌍둥이 전략(Twin-track approach)을 추구하는 것은 이 점에서 시사적이다.

성주류화 20년이 남긴 과제들은 이 전략을 올곧게 추진하기 위하여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함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성주류화의 추진을 위한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관련정책을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조정하는 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성별영향평가라든가 성인지예산과 같은 성주류화의 도구와 수단은 그것이 현실의 불평등한 젠더체계를 변화시키는 목적에 진정 기여하고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성주류화를 위한 민주적 거버넌스의 구축은 정책현장에서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성주류화는 젠더의 불평등한 체계를 바로잡기 위한 ‘새판짜기’의 전략, 즉 가장 소외된 약자와 소수자의 의제들을 정치화해 성평등의 장으로 초대하기 위한 전략으로 자리매김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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