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버럭 엄마와 평화주의자 딸의 유럽 공연 축제 여행] ③ 보랏빛 물결, 프로방스 뤼베롱

프랑스에 산이 있다고? 알프스 말고?

따님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세잔의 ‘생뜨 빅뜨아르’ 기억 안 나?

아, 아, 아 그랬지.

거기 가보자 우리. 여기서 가까워.

등산화도 안 가져왔는데?

거길 왜 걸어 가, 차타고 가지

 

퐁뒤갸르 ⓒ박선이
퐁뒤갸르 ⓒ박선이

알아듣지 못 하는 프랑스어 공연에 지칠 무렵, 모녀는 분연히 아비뇽을 떠났다. 극장 순례만 하기에는 빛나는 태양과 짙푸른 하늘, 향긋한 바람이 너무도 유혹적이었다. 투어 버스를 탈 것인가, 시외버스를 탈 것인가, 렌트카를 할 것인가. 아비뇽 관광사무소와 아비뇽 중앙역 옆 시외버스 터미널, 중앙역 렌트카 사무실을 차례로 들러 열심히 계산기를 두들기고 가성비를 잰 끝에 차를 빌리기로 했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싶은 시간에 가고 싶다는 자유의지의 발현이었다.

첫 목적지는 쏘(Sault). 라벤더 재배로 유명한 곳이다. 라벤더는 6월에 활짝 피기 시작해 7월 초면 추수를 시작한다. 우리가 여행한 7월 하순은 추수가 거의 끝났을 무렵이지만, 산 위로 가면 아직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향을 정했다. 카르팡트라(Carpantras)를 지나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든다. 표지판을 보니 방투산(Mont Ventoux)이다. 이런, 이런. 이 산이 아닌 개비여, 라더니. 뤼베롱 지역 자연공원(Parc Naturel Régional du Luberon)을 중심으로 방투산은 북쪽, 생뜨 빅투아르는 남쪽에 있다. 생뜨 빅투아르를 가려면 남동쪽으로 갔어야 한다. (헐)

 

라벤더 재배지로 유명한 쏘. 라벤더는 6월에 활짝 피기 시작해 7월 초면 추수를 시작한다. ⓒ박선이
라벤더 재배지로 유명한 쏘. 라벤더는 6월에 활짝 피기 시작해 7월 초면 추수를 시작한다. ⓒ박선이

방투는 ‘바람(vent)+기침(toux)’의 합성어란다. 큰 바람으로 재채기를 터뜨린다는 뜻일까? 해발 1911m 꼭대기로 가는 길은 눈 쌓인 듯 온통 하얀 석회암이다. 이곳이 바로 고흐를 미치게 했던 미스트랄의 본산.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고산 지대의 찬 공기가 산의 경사면을 따라 협곡과 저지대로 불어온다. 1년 중 100여일을 거칠게 불어대는 미스트랄 때문에 측백나무, 전나무로 방풍림을 조성하고 두꺼운 돌집을 지었다. 창문에는 두터운 나무 덧문이 달려있다. 방투산 9부 능선을 넘어 협곡을 내려가니 쏘가 있다. 산 아래로 연회색 들판이 펼쳐진다. 라벤더다. 한창 피어날 땐 선명한 보라색이지만, 웃자라 쇠한 라벤더는 연회색에 가깝다.

프로방스 여행의 핵심은 산꼭대기의 작고 예쁜 마을과 고대 로마 유적 구경이다. 여름에는 라벤더가 추가된다. 화장품 회사 록시땅이 출발한 모나스크(Monasque)나 발랑솔(Valensole) 같은 곳은 수십만평에 이르는 라벤더 밭 체험이 한 여름 가장 중요한 관광 상품이다.

아름다운 마을과 라벤더를 동시에 만난 곳은 고르드(Gorde)이다. 고르드는 보클뤼즈 산 속 높은 봉우리 위에 지금도 중세 마을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놀 때는 부지런한 우리 모녀는 아비뇽을 7시에 출발했는데, 너무 일찍 도착한 터라 카페도 가게도 모두 문을 안 열어 계획에 없던 계곡 산책까지 했다. 아홉시가 되니 햇빛이 뜨거웠다. 소박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속속들이 비싼 카페와 식당뿐인 관광 마을. 절벽에 붙여지은 호텔의 테라스 바에서 엄청난(!) 가격의 모히또로 목을 축인 뒤 협곡의 절경을 즐기는 것으로 겨우 분풀이를 했다. 고르드를 찾은 이유는 실은 세낭크 수도원을 가기 위해서였다. 마을 너머에 수도원이 있다기에 걸어갈 요량이었는데, 4.3km 구절양장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수도원 앞 라벤더 밭은 수사들이 직접 농사를 짓는다는데, 제주도 유채 밭처럼 사진 촬영 배경으로 더 많이 이용되고 있었다. 마침 아침 미사가 진행되는 시간이었다. 반주 없이 부르는 성가가 성당의 궁륭 천장을 휘감으며 천상의 소리로 울려퍼졌다. 수사들이 참례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눈인사로 기도를 나누는 순서가 있었다. 투명하고 맑은 시선과 마주친 순간, 가슴이 뚫리는 듯 했다. 나는 이곳에 무엇 하러 왔는가. 흘깃 딸을 보니, 눈물이 가득하다. 그렇게 우리는 한 마음으로 한 자리를 함께 했다.

 

루시옹 흙집 ⓒ박선이
루시옹 흙집 ⓒ박선이

뤼베롱의 작은 마을들은 산꼭대기에서 저마다 개성을 발휘한다. 붉은 점토암 지대에 자리잡은 루시옹(Roussilon)과 프랑스 전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된 메네르브(Menerbe)를 빼놓을 수 없다. 루시옹 언덕을 오르던 중 주유 붉은 등이 들어왔다. 산꼭대기 마을에서 ‘엥꼬’로 오도 가도 못 하는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 마침 조그만 집 앞에 차를 세우는 할머니에게 가장 가까운 주유소를 물었다. 13km 떨어진 앱트(Apt)로 가란다. 누가 프랑스 사람들이 영어 안(못)하고 불친절 하다고 했나! 아를의 골목에서도, 방투산 산길에서도, 롤러블레이드를 타던 청년과 주말 장터를 철수하던 아저씨가 너무도 친절하게, 자기 휴대폰까지 쓰게 해주며 온갖 안내를 다 해줬다.

붉은 점토암으로 지은 집들이 아름답던 루시옹. 관광객으로 붐비는 마을 카페를 포기하고 골목을 따라 걸었다. 햇빛에 하얗게 바랜 나무 덧문과 길바닥 까지 내려온 담쟁이 잎이 붉은 황토벽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메네르브는 뒷길을 오르니 마을 공동묘지로 이어진다. 1600년대부터 이어진 가족묘에는 진분홍 꽃이 생생했다. 아무래도 마을 여행은 엄마 취향이었다. 눈에 띄게 지루해하는 딸에겐, 아이스크림 뇌물을 올렸다.

 

아를-밤의 골목 카페 ⓒ박선이
아를-밤의 골목 카페 ⓒ박선이

Tip.

빼놓지 마세요: 로마 유적, 그리고 고흐의 흔적

오랑주에는 로마 제국의 야외극장이 남아있다. 객석 꼭대기 올라서니 다리가 후들후들. 주말저녁에 ‘아이다’ 공연이 있다고 무대 설치가 한창이다. 극장 구경만 하고 나왔다. ‘토건 제국’ 로마가 2000년 전 건설한 퐁 뒤 가르는 가르 강 위에 49m높이로 건설된 수도교다. 3개 층의 아치는 로마의 콜로세움만큼 인상적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로마 수도교 중 가장 높고 잘 보존되었다고 한다. 최근에 영화 ‘파리로 가는 길’에서 아주 로맨틱한 장면의 배경으로 나왔는데, 실제로 우리가 갔을 때도 소풍 나온 가족들이 많았다. 강으로 다이빙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고대 유적과 멋진 대비를 보였다. 아를의 원형경기장은 도시의 심장을 이룬다.

아를과 생레미는 고흐의 흔적이 강렬한 곳이다. 아를에서 고흐는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 테라스’ ‘빈센트의 침실’ ‘우체부 롤랑’ ‘해바라기’ 같은 대표작을 그렸다. 자신의 귀를 자른 뒤 그린 <자화상>도 이곳에서 나왔다. 귀를 자르고 입원했던 정신병원은 지금 고흐 관련 자료를 전시하는 문화센터로 바뀌었고, 노란색이 따뜻하게 빛나는 밤의 카페는 그림 속 모습으로 관광객을 부른다. 관광안내소에서 고흐 지도를 판매하며, 시내 지도는 무료. 생레미도 고흐 발자취 찾기가 관광 상품 1호다. 생폴 요양원도 고흐가 사랑했던 ‘ㅁ’자 정원과 병실, 의자를 그림 속 그대로 재현해 놨다. 20곳을 연결하며 고흐의 작품과 지역을 설명한다.

그리고 또 하나: 멜론

프로방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신선한 멜론을 싼 값에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어른 주먹보다 조금 큰 머스크멜론(겉에 그물무늬가 있다)을 동네 식품점에서 1~2 유로(1,400~2,800원)에 살 수 있다. 주황색 속살이 아삭하며 즙이 많다. 아비뇽 일대는 프랑스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멜론 산지다. 우리 모녀는 멜론 하나를 나눠 먹으면 한 끼 식사를 대신할 수 있었다. 얇게 썬 프로슈토햄을 사서 멜론에 얹어 먹으면 고급 레스토랑이 부럽지 않다.

 

라벤더 재배지로 유명한 쏘. 라벤더는 6월에 활짝 피기 시작해 7월 초면 추수를 시작한다. ⓒ박선이
라벤더 재배지로 유명한 쏘. 라벤더는 6월에 활짝 피기 시작해 7월 초면 추수를 시작한다. ⓒ박선이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